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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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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초에 영미권에 폭풍적인 관심을 얻은 책 'Sapiens'이다. 아직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았지만 정말 섬뜩하리만치 무섭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은 미친듯이 달려나가고 있는데 아직도 경제-정치제도, 심지어 종교도 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초기를 보는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으로 인류가 농경문화에서 탈피하여 산업화를 통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 힘을 컨트롤 하기에 인간은 너무 미숙했고 결국 넘치는 힘의 포화로 세계 1, 2차 대전을 발현시켰다. 그리하여 전 세계는 온갖 학살과 노예화, 제국주의와 식민지, 폭력과 전쟁이 휘몰아친 니체의 말대로 정말 '미친 광풍'이 20세기를 강타했었다.

이제 21세기에 들어서 다시금 그런 시대의 격변기로 접어든 것 같다. 컴퓨터-인터넷-스마트폰 혁명으로 인해 무선-디지털화는 더더욱 가속을 받고 있다. 정보화 혁명이 이뤄낸 엄청난 성과를 따라잡지 못하는 인류의 사고와 지능은 이제 도태되는 것인가? 나는 솔직히 말해 조금 무섭다. 지금 기술자들, 엔지니어들과 기업들은 서로 협력하여 인간이 넘어서는 안되는 선까지 넘보는 상황이다. 그들은 거침이 없다. 무엇이든 이뤄내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세계 석학들을 끌어모아 그들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한다.

이 정도 속도라면 (그리고 앞으로 더더욱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공상과학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던 것들이 현실화 되는 것은 머지 않을 것이다. 줄기세포와 인간복제/교배, 유전자조작과 나노기술을 통한 새로운 변종 생명체 설계(키메라와 같은, 이와 같은 것들로 얼마든지 군대를 조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빅데이터를 집약한 거의 인간과 구분이 불가능한 인공지능,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인간과 기계를 접목시킨 사이보그, 무선통신으로 연결된 RFID와 온갖 뇌과학, 심리학으로 점철된 가상현실- 현재 여기에 가장 앞서나가는 것이 포르노산업이다- 등등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

드디어 인간은 자연을 넘어서 인간 그 자신을 스스로 변형시키는 사태까지 초래한 것이다. 모든 인간성도 (인류 역사상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고 유지되 온 것들도) 얼마든지 우리 원대로 바꾸고 조작할 수 있다. 내가 가장 우려하던 '인간개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난 직전쯤인 2080~90년도에는, 내 자식들과 손자들이 살 세계가 바로 이런 세상이다.

이렇게 세상은 엄청난 기술문명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데 아직도 기독교 지성인들은 그리고 목사들과 신학자들은 너무 Naive한 사상과 생각 속에 갇혀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히틀러를 찬양한 독일 루터교처럼 시대조류에 휩쓸려 당시 자유주의 신학처럼 기독교의 토대와 뿌리 자체가 뜯겨나가는 상황을 다시금 경험할 것이다.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된 현대문명은 이제 그 넘치는 힘을 통제하지 못하여 또는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에 관한 그 어떠한 방향성도 상실한채 표류하기 십상이다. 그것이 나아가야할 가이드라인을 누가 제시할 것인가? 무제한적 자유는 결국 루이스의 <인간폐지>에서 언급된 것처럼 다시 자연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더이상 ought가 아닌 오로지 want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은 벌써부터 이것에 대해, 이런 세상이 올 것에 대비해 신학적으로, 진화-생물학적으로 끊임 없이 공부를 하고 계신다. 앞으로 뇌과학, 행동심리학,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올 것은 이제 자명하다. 이 학문들을 공부하지 않고 금시대를 논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분이 계시기에 나는 희망을 보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현대문명은 넘어서는 안되는 한계까지 넘보고 있다. 인간은 반드시 그 선을 언젠가 넘을 것이다. 왜냐면 인간은 하지말라는 것은 더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기어이 하고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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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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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악과 부조리와 비극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마도 모든 것에 완벽한 해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선하고 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차라리 신이 없다면 아무 문제꺼리도 되지 않았을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제일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하다.


 신정론(theodicy, 神正論)  : 인간 실존과 하나님에 대한 문제


 

 최근 새물결에서 정말 좋은 책이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뛰어난 신학자가 있음에 나는 너무 감사하다. 이 분 내력을 조사해보니 특히 이쪽 변신론, 신정론 쪽에서 가장 알아주는 분이시다. 책 안에서도 밝히지만 자신이 왜 이 한 문제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었는지는 결국 그의 인생과 삶에 관련되어 있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당혹스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음으로몰리게 된 것은 내 친할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버려졌을 때다. 그래서 그 당시 몰두했던 학문도 자연스레 실존주의적 철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쓸모있었던 철학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기록을 해둔 게 있어서 참 다행이다.



 "

나는 내 어린시절을 거의 할머니와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직장생활을 하셔서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양로병원에 계신다. 정말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할머니는 신앙이 굉장히 좋으시다. 언제나 할머니 중심으로 내가 16살까지 단 한번도 매일 가정예베를 거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왜 그렇게 계신가? 자식들도 다 내팽게치고 그렇게 외딴곳에서 홀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속에 혼자 계신다. 간호사도 (나는 돈으로 엮인 관계는 믿지 않는다) 그 쓸모없는 존재를 뒤치닥거리 하는게 역겨울 것이다. 물론 우리가 방문할 때면 밝은 미소로 맞아주지만 우리가 없을 때 할머니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나는 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나도 나중에 늙으면 내 친구들도 다 죽어가고 더이상 소통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이 저리 비참하게 죽어갈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것이 정신적 고통이다. 나는 안다. 늙어서도 사람의 영혼은 똑같다는 것을, 다만 껍데기만 쭈글쭈글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버려버릴 쓰레기로 본다는 느낌을...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가서 손을 꼭 잡아줄때마다 우신다. (치매 비슷한 것도 있으셔서 말을 잘 못하신다) 그냥 하염없이 우신다.

 

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대체 왜 이따구냐고, 할머니를 사랑하는게 맞냐고, 대체 왜 우리를 만들어서 이리 비참한 곳에 쳐박아 버리냐고! 돌아가게 하시려면 빨리 돌아가게 하시던가, 아니면 할머니의 건강을 좀 어떻게 해주라고... 나는 더이상 할머니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할머니가 천국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그 광경을 목격할 때면... 마치 다죽어가는 사람에게 성경주면서 '천국가세요!'라는 그런 무의미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오직 친척중에서 우리 부모님만 할머니를 모신다.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바쁘셔서 최근에는 또 자주 못가신다. 나는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더 웃긴건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마음한구석에선 '아무리 할머니가 저러셔도 나도 내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이기성이 고개를 쳐든다.. 나 조차도 쓰레기다.

"



 이 당시가 2010년이니 벌써 5년이나 지났지만 할머니의 상태는 오히려 더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간병인이 일부러 할머니를 때려 넘어뜨린 바람에 정강이가 부러져 대수술을 받고 이젠 거의 반 식물인간 상태시다. 모든 친척들도 할머니를 병원이란 감옥에 쳐박아둔채 버려진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있었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처참한 고독속에서 하루하루를 끔찍하게 연명하고 계신다.


 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건 병문안 가도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압도한다. 좌절감, 죄책감, 절망이 나를 미치게한다. 그저 눈물만이 눈가에 아른거릴 뿐이다. 차라리.. 차라리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는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내게 '너는 내가 이렇게 되도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다오'라며 간곡히 당부하신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이렇게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붓다가 정확히 보았다. 신이 없는 인생은 그저 생로병사요 평생을 생존에 고군분투해야하는 정글이자 치열한 전투이다. 많은 철학자가 이를 설파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온갖 해답을 내놓으려 애썼지만 결국 3,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 그것도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작년 대한민국에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40여년전에는 베트남전쟁이 있었으며 50년전에는 스탈린의 대학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 있었다. 그보다 더 전인 70여년전에는 아우슈비츠가 탄생했다. 20세기만해도 이 정도이다. 더 열거하기도 벅차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수용소에선 탈출하려는 임신한 여자를 배갈라 난도질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정녕 그렇게 창자가 터져 죽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이다. 나도 어쩌면 저렇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고통받으며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 형제들> 대심문관 편에서 차라리 그럴바에 빵을 줄 것이지 왜 이토록 나약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냐고 예수에게 따진다. 이 책에서는 이와같은 질문들 즉, 전통적인 기독교 신정론이 놓친 바로 그 맹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간단히 먼저 정리하자면


 A.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 고난, 고통, 역경 : 전통적 해석

(베드로사도의 말처럼 이기지 못할 시련을 주시지 않으신다)

   a-1 : 인과응보에 따른 심판적 성격

   a-2 : 새끼 독수리를 절벽으로 내모는, 강하게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감독이 선수들을 지옥훈련 시키는 성격의 훈계적 성격

   a-3 : 특별한 하나님의 불특정한 뜻에 의한 개입적 성격


 위와 같은 성격의 고난은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거의 할 수 있는 모든 통찰을 담아놓았다.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이해되는 설명이다. 이런 류는 오히려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타인의 아픔까지 공감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내가 내 욕심에 따른 기복적이고 거래관계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로서의 역할도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상황이 악조건이고 더이상 바라볼 것이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를 신뢰하며 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려는 순수한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스 마저 조이를 잃고 자신이 그 책을 쓴 것을 후회한다하며 나온 <헤아려 본 슬픔>은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고통이다. 그 뛰어난 지성의 루이스 마저 하나님을  '인간을 쥐처럼 가둬두고 생체실험 하는자인가?' 또는 '그 작자는 사탕을 빼앗고 사탕을 먹고 싶지 않을 때가 되서야 다시 사탕을 주는 사디스트인가?'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것이 바로 다음 유형이다.


 B. 하나님이 전혀 원치도 않으시고 직접 주시지도 않은 고통

- 어린아이 : 며칠전 네이버에도 12살짜리 아이를 7kg까지 굶기고 학대해 죽인 사건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단 한명의 어린이라도 고문을 당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극단으로 내몰린 상황 : 예를들면 30년간 아내를 간호하다 그 정신적 고통에 못이겨 자살한 사람, 극단적 고문에 배교한 신자, 아우슈비츠, 세월호 등등..

-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자연재해, 질병, 죽음


 바로 이러한 성격의 고난을 단지 모두 신의 뜻이고 섭리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욥의 친구들처럼 내 일이 아니니 그냥 쉽게 생각하며 시끄럽게 하지말고 받아들여라, 잠잠하라(서초역에 큰교회 목사인걸로 알고 있다)라며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들을 코너로 몰아간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력히 변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 (p.103) 그리고 함께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였고 인간이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길 꿈꿨는데, 인간들의 죄악성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을 보며 하나님이야 말로 가장 아파하며 가슴이 찢어지시며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고난에 자신이 참여함으로서,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이를 몸소 보여주셨다, 이를 극복하게 하고 헤쳐나가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악을 선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지, 선으로 승화시킬려고 일부러 악을 만드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런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울의 말처럼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상대방의 고통을 내 일 처럼 여기며 그저 말 없이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또한 고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 혹은 악한 사회구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다. 크리스천이라면 꼭 한번 누구나 일독하기를 권한다.

 

http://blog.naver.com/917ph/220369350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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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지음, 하진호.박옥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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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또는 흑야로 유명한 엘리 위젤의 희곡이다. 예전부터 위젤의 책들을 읽고 싶어도 국내에 발간된 것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었는데, 포이에마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낸 것 같다. (요즘 이 출판사를 매우 눈여겨 보고 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삼고로드란 마을의 여관주인과 웨이터 마리아, 연극악단 유대인 3명과 개신교 성직자가 신을 피고로 세우고 신을 재판하는 내용이다. 여관주인은 신의 유죄를 묻는 검사 측을, 그리고 어떤 한 젊은 나그네는 모두가 떠넘긴 신을 옹호하는 변호사 측을 맡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주인공 여관주인이다. 이 사람은 그 사건이 있기전 매우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언제나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술집에 놀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그의 아내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무리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유대인 살육을 시작했다. 그는 술집의자에 묶인채 자기 아내와 딸은 침입한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는 울면서 절규하며 신에게 부르짖는다.


 '주여 우리를 제발 구원하소서!'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주인공을 맞는다. 그러는 그를 보고 약탈자들은 크게 비웃는다. 결국 저항하다 아내는 무참히 살해당했고, 딸은 정신병자가 되어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삼고로드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버렸다.


 그는 생각한다. 왜 신은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면서 방관하였는가? 그는 우리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고통에 차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인가? 여관주인은 더이상 웃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냉소와 하늘을 향한, 신을 향한 맹렬한 분노뿐..


 여기서 바로 젊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매우 침착하며 감정이 없는, 그리고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다. 그는 여관주인의 모든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방청객인 다른 유대인들조차 이제 이 나그네가 신의 대리인이라고까지 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을 옹호하는 바로 그 젊은 나그네의 정체가 사탄으로 밝혀지며 막이 내린다.


 작가는 아무리 인간사의 모든 부조리와 비극이 비록 그것이 온갖 현학적인 설명으로 논박이 가능하더라도 그 인간의 비통한 심정 자체를 공감하지 못하는 비인간성이 바로 사탄이라고 정의한다.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욥의 친구처럼 이것저것 잣대를 들이대며 괴롭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말보다는 그저 안아주고 위로와 공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갖다붙여도 설명이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논박이 가능하다. 일차적으로 그 죄는 강도가 저지른 것이지 신이 저지른것도 아니며, 신의 뜻도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또한 그들은 사실상 신이 복을 줄때만 나에게 의미있는 신이라는 실용주의의 신, 기복신앙의 신일 뿐이다. 잘 생각하면 그것은 댓가의 신이며 거래의 관계이다. 신은 진정한 사랑,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더라도 나를 사랑하느냐'와 같은 사랑을 바라신다. 마치 저 여자가 나의 돈과 힘을 사랑하는 건지 혹은 저 남자가 나 자체보다 내 외모와 껍데기 육체, 몸매만을 원하는 건지 의심하고 고민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신은 가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미친 명령까지 한다. 너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너의 가장 사랑하는 100세 이후에 가진 첫 네 소생까지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하느냐?


 비신자들이 볼때는 이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짓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너의 어미와 친척 형제들 싹다 버리고 나만 따르라고 예수가 명령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참 행복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가족보다도 더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버리면 모두가 죽지만 내가 진리를 받아서 내 가족까지도 진리로 이끌면 모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절벽으로 달려가는 가족들을 말리려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와 같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그들을 먼저 버리라는 모순적이지만 역설적인 진리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이 가끔씩 우리 인생에 작은 일에도 개입하는데 왜 저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있지도 않은 듯,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아무 개입이 없냐고 한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럼 신은 자기 맘이 가는대로 개입하기도 하고 비-개입하기도 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은 기계의 사랑을 원한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그것에 따른 필요악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죽을때도 왜 우리를 죽게했냐고 따지거나, 세월호가 침몰할 때마다 신은 그것을 막아야하며 심지어는 '세계대전을 왜 안막았습니까?'처럼 끝없이 따져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도 신을 완벽히 유죄로 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신은 또한 우리의 믿음과 단련을 또는 믿음의 시험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채찍이나 사랑의 매일 때도 있다.


 자, 그러면 실제 저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것이 신의 뜻이니 잠자코 받아들이라며 그를 몰아붙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통과 역경과 부조리와 비극을 직접 맞은 사람에겐 그딴 소리가 얼마나 다 헛소리고 개소리로 들리겠는가? 나같아도 누군가 그렇게 군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 사람과 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커져갈 것이다.


 나도 이렇게 머리로는 그저 머리와 짱구로는 다 납득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정말 나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욕하고 저주하며 온갖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주여 그저 나약한 나를 붙드소서! 나약한 우리 인간을 용서하소서)



 저명한 소설가 조성기의 야훼의 밤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이 선교하러 선교지에 갔다가 흑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귀국하게 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위젤의 나이트에서도 아우슈비츠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바둥바둥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도대체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심지어 그 아이는 어린아이라 가벼워서 오랜시간 뒤에 혀가 흘러내리며 죽었다)

- 이후 이 광경을 목격한 위젤은 완고한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이 모든게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당신 자식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다면? 혹은 내 딸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간 선교지에서 집단강간을 당하고 미쳐버린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한번 당신 마음에 물어보라 우리가 만약 삼고로드의 여관주인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래도 신을 꾸준히 사랑하며 '신은 숭배받기 합당하신, 지당하신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여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욥의 친구들 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저 여관주인에게 온갖 신학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을 들이대며 신을 원망하는 그를 나무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당신이 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옳다며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당신이라면 저 필리핀 소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리핀 방문 마지막 날인 18일 마닐라 산토토머스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교황은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가 12세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울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다 문득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왜 우리를 도와주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교황은 소녀를 안아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P통신은 “교황은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며 “교황은 미리 준비한 영어 연설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시간이 지난 뒤 대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마약을 먹는 아이들, 집이 없는 아이들, 방치되고 착취당한 아이들, 사회가 노예로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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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 글항아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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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수와 연봉 1억 받는 월급쟁이 중 누가 더 잘사는가? 정답은 바로 백수이다. 왜냐면 이 백수는 자산이 1000억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득불평등 지수는 상당히 양호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산불평등 지수는 거의 극단적일 정도로 심각하다. (우리나라 토지의 50%가 소수 1%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경제학에서는 언제나 소득불평등만을 문제로 삼지 재산불평등은 잘 거론하지 않는다. 심지어 통계청에서도... 그리고 기득권층은 우리나라 양극화는 결코 심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2014년 서울대 교수들의 핫 키워드 '지록위마(鹿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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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 (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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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와 연봉 1억 받는 월급쟁이 중 누가 더 잘사는가? 정답은 바로 백수이다. 왜냐면 이 백수는 자산이 1000억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득불평등 지수는 상당히 양호하다. 그러나 재산불평등 지수는 거의 극단적일 정도로 심각하다. 그러나 경제학이나 통계청에서는 언제나 소득불평등만을 거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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