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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세상에 이렇게 많은 악과 부조리와 비극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아마도 모든 것에 완벽한 해답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선하고 전능한 신이 계시다면, 차라리 신이 없다면 아무 문제꺼리도 되지 않았을 일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 그 누구도 아닌 제일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 그러하다.
신정론(theodicy, 神正論) : 인간 실존과 하나님에 대한 문제
최근 새물결에서 정말 좋은 책이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뛰어난 신학자가 있음에 나는 너무 감사하다. 이 분 내력을 조사해보니 특히 이쪽 변신론, 신정론 쪽에서 가장 알아주는 분이시다. 책 안에서도 밝히지만 자신이 왜 이 한 문제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었는지는 결국 그의 인생과 삶에 관련되어 있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도 이런 당혹스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처음으로몰리게 된 것은 내 친할머니가 쓰러져서 병원에 버려졌을 때다. 그래서 그 당시 몰두했던 학문도 자연스레 실존주의적 철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쓸모있었던 철학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기록을 해둔 게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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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어린시절을 거의 할머니와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모두 직장생활을 하셔서 나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양로병원에 계신다. 정말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할머니는 신앙이 굉장히 좋으시다. 언제나 할머니 중심으로 내가 16살까지 단 한번도 매일 가정예베를 거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 할머니는 왜 그렇게 계신가? 자식들도 다 내팽게치고 그렇게 외딴곳에서 홀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속에 혼자 계신다. 간호사도 (나는 돈으로 엮인 관계는 믿지 않는다) 그 쓸모없는 존재를 뒤치닥거리 하는게 역겨울 것이다. 물론 우리가 방문할 때면 밝은 미소로 맞아주지만 우리가 없을 때 할머니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나는 안다.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나도 나중에 늙으면 내 친구들도 다 죽어가고 더이상 소통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이 저리 비참하게 죽어갈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것이 정신적 고통이다. 나는 안다. 늙어서도 사람의 영혼은 똑같다는 것을, 다만 껍데기만 쭈글쭈글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의 눈빛이 나를 버려버릴 쓰레기로 본다는 느낌을... 그래서 할머니는 내가 가서 손을 꼭 잡아줄때마다 우신다. (치매 비슷한 것도 있으셔서 말을 잘 못하신다) 그냥 하염없이 우신다.
내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대체 왜 이따구냐고, 할머니를 사랑하는게 맞냐고, 대체 왜 우리를 만들어서 이리 비참한 곳에 쳐박아 버리냐고! 돌아가게 하시려면 빨리 돌아가게 하시던가, 아니면 할머니의 건강을 좀 어떻게 해주라고... 나는 더이상 할머니의 모습을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할머니가 천국갈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그 광경을 목격할 때면... 마치 다죽어가는 사람에게 성경주면서 '천국가세요!'라는 그런 무의미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헛소리 집어치우라고!
오직 친척중에서 우리 부모님만 할머니를 모신다. 부모님도 어쩔 수 없이 바쁘셔서 최근에는 또 자주 못가신다. 나는 가슴이 찢어진다. 그러나 더 웃긴건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마음한구석에선 '아무리 할머니가 저러셔도 나도 내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이기성이 고개를 쳐든다.. 나 조차도 쓰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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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가 2010년이니 벌써 5년이나 지났지만 할머니의 상태는 오히려 더더욱 악화되었다. 심지어 간병인이 일부러 할머니를 때려 넘어뜨린 바람에 정강이가 부러져 대수술을 받고 이젠 거의 반 식물인간 상태시다. 모든 친척들도 할머니를 병원이란 감옥에 쳐박아둔채 버려진 쓰레기처럼 취급하고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있었던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할머니는 여전히 처참한 고독속에서 하루하루를 끔찍하게 연명하고 계신다.
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건 병문안 가도 더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압도한다. 좌절감, 죄책감, 절망이 나를 미치게한다. 그저 눈물만이 눈가에 아른거릴 뿐이다. 차라리.. 차라리 하나님이 빨리 데려가셨으면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이렇게 인간이 존재하는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할머니를 보고 어머니는 내게 '너는 내가 이렇게 되도 절대 병원에 데려가지 말아다오'라며 간곡히 당부하신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이렇게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붓다가 정확히 보았다. 신이 없는 인생은 그저 생로병사요 평생을 생존에 고군분투해야하는 정글이자 치열한 전투이다. 많은 철학자가 이를 설파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이에 대해 온갖 해답을 내놓으려 애썼지만 결국 3,000년전이나 지금이나 바뀐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신을 믿는, 그것도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은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작년 대한민국에 세월호참사가 일어났다. 40여년전에는 베트남전쟁이 있었으며 50년전에는 스탈린의 대학살,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이 있었다. 그보다 더 전인 70여년전에는 아우슈비츠가 탄생했다. 20세기만해도 이 정도이다. 더 열거하기도 벅차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수용소에선 탈출하려는 임신한 여자를 배갈라 난도질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진다. 그렇다면 그 여자는 정녕 그렇게 창자가 터져 죽기 위해 태어났단 말인가?
이것이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실존이다. 나도 어쩌면 저렇게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고통받으며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조프 형제들> 대심문관 편에서 차라리 그럴바에 빵을 줄 것이지 왜 이토록 나약한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냐고 예수에게 따진다. 이 책에서는 이와같은 질문들 즉, 전통적인 기독교 신정론이 놓친 바로 그 맹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간단히 먼저 정리하자면
A.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는 고난, 고통, 역경 : 전통적 해석
(베드로사도의 말처럼 이기지 못할 시련을 주시지 않으신다)
a-1 : 인과응보에 따른 심판적 성격
a-2 : 새끼 독수리를 절벽으로 내모는, 강하게 훈련시키고 단련시키는,
감독이 선수들을 지옥훈련 시키는 성격의 훈계적 성격
a-3 : 특별한 하나님의 불특정한 뜻에 의한 개입적 성격
위와 같은 성격의 고난은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에서 거의 할 수 있는 모든 통찰을 담아놓았다.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이해되는 설명이다. 이런 류는 오히려 사람을 성숙하게 하며 타인의 아픔까지 공감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그리고 그 고통과 어려움을 통해서 더욱 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내가 내 욕심에 따른 기복적이고 거래관계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로서의 역할도 존재한다. (진정한 사랑은 모든 상황이 악조건이고 더이상 바라볼 것이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를 신뢰하며 주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려는 순수한 의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스 마저 조이를 잃고 자신이 그 책을 쓴 것을 후회한다하며 나온 <헤아려 본 슬픔>은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고통이다. 그 뛰어난 지성의 루이스 마저 하나님을 '인간을 쥐처럼 가둬두고 생체실험 하는자인가?' 또는 '그 작자는 사탕을 빼앗고 사탕을 먹고 싶지 않을 때가 되서야 다시 사탕을 주는 사디스트인가?'라며 분노를 표출한다. 이것이 바로 다음 유형이다.
B. 하나님이 전혀 원치도 않으시고 직접 주시지도 않은 고통
- 어린아이 : 며칠전 네이버에도 12살짜리 아이를 7kg까지 굶기고 학대해 죽인 사건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까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단 한명의 어린이라도 고문을 당한다면, 과연 하나님이 자신을 정당화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극단으로 내몰린 상황 : 예를들면 30년간 아내를 간호하다 그 정신적 고통에 못이겨 자살한 사람, 극단적 고문에 배교한 신자, 아우슈비츠, 세월호 등등..
-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자연재해, 질병, 죽음
바로 이러한 성격의 고난을 단지 모두 신의 뜻이고 섭리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욥의 친구들처럼 내 일이 아니니 그냥 쉽게 생각하며 시끄럽게 하지말고 받아들여라, 잠잠하라(서초역에 큰교회 목사인걸로 알고 있다)라며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들을 코너로 몰아간다. 이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력히 변호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바로 거기 고통당하는 자의 곁에서 함께 계셨다" (p.103) 그리고 함께 슬퍼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였고 인간이 올바르고 행복하게 살길 꿈꿨는데, 인간들의 죄악성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세상을 보며 하나님이야 말로 가장 아파하며 가슴이 찢어지시며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 고난에 자신이 참여함으로서,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 이를 몸소 보여주셨다, 이를 극복하게 하고 헤쳐나가게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진정으로 악을 선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지, 선으로 승화시킬려고 일부러 악을 만드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거야말로 정말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런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웃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바울의 말처럼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상대방의 고통을 내 일 처럼 여기며 그저 말 없이 묵묵히 옆에 있어주고, 또한 고난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 혹은 악한 사회구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한다. 크리스천이라면 꼭 한번 누구나 일독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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