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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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쯤 포스팅하고 싶었던 책이다.

http://blog.naver.com/917ph/220171141710 

 

< 피로사회 >

 

 

- 자본주의는 분명히 절대적가치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자신은 여기에서 교묘히 제외시킨다. 즉, 들뢰즈가 말했던 바로 탈영토화 이후 재영토화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포스트모던은 모든것을 해체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모든것들을 자기 자신들로 대체시키도록 보이지 않게 강요했다. 지금 세계는 모든 사람들, 문화들을 존중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있다. 누가 아프리카의 가나와 미국을 사실상 동등하게 보겠는가? 뭐든지 인정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Nudge가 있다. 잘생긴사람, 부자, 가진자, WASP 등 이 안에서도 주류가 엄연히 존재한다. (코드화, 영토화) 우리는 이들을 숭배하게끔 세뇌받는다. 그래서 비주류, minority, 배제된자들, 가난한자들, 장애인, 노인들조차도 모두가 다 '잘생겨지고'(상징적의미) 싶어하게 된다.

 

- 우리가 언제 가장 행복했었는지 떠올려보라, 지금 시대는 갈수록 파편화된, 찢겨진, 개인, 부품화, 도구, 소외 그로인한 외로움, 우울증, 무력감 등등 이미 교과서에도 이것들이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라고 몇십년도 더 전부터 기록되왔었다.

 

- 자유를 위해 공동체, 사회, 절대적인것, 보편적인것을 대가로 치룬 결과

- 지루함, 답답함, 권태, 쳇바퀴, 정해져있는, 주어진 문화, 보이지 않는 강요,

  의지할곳이 없이 내던져짐(극단적자유)

 

p32.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Attention)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Hyperrattention)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 오히려 현대 자본주의의 심각한 개인화에 따른 (골방주의, 방콕, 칩거 등) 절대고독 등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이 사색을 한다. 그러나 역시 공적인 자리에서 보여지는 것은 활동적 삶으로 제한된다. 공적인 분야에서 연애(섹스), 스포츠, 드라마 이외의 것을 주제로 담론을 가지려 한다면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현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즐기라고 허용된 것만 많은 것을 즐길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압력을 가한다. 물질적 풍요로 사람들의 눈과 코와 귀를 막는다. 마치 힌두교에서 말하는 마야(Maya, 사물의 본질을 볼수 없게 흐리도록 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의 총체)와 같은 형태를 띈다. 현대사회는 인간을 동물로써 사육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점차 느긋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는것이다.

 

p.41.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결핍 앞에서 초조와 불안이 생겨난다. (도무지 참을 수 없다, 이 존재의 가벼움을)

 

p 43.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p 50. 공포가 특정한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상실은 곧 자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p 72.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에덴의 시간, 노장사상)

 

p 91. 우울증 환자는 무형적이다. 그는 성격없는 인간이다. (기계부품, 도구) 어떤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역할이나 기능도 수행할 수 있는 유연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무형성 내지 유연성은 높은 경제적 효율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기능성만 뽑아서 사용하는,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정글)

- 모든것 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인격자체가 배제되는 상황

 

"그 사람이 누구냐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그가 일을 잘하냐 못하냐이다. 심지어는 인간관계도 이젠 일을 '잘하냐 못하냐'에 속하게 되버렸다. 아무리 화가나도 기능성을 위해 누구와도 잘 지내야한다"

 

p 96.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p 97. '주도적이야 한다는 요구'의 끝없는 반복에 지쳐 있는 것이다.

 

p 103.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이것이 거의 자본주의의 최종 완성의 단계이다, 자가착취) 이상자아에 비하면 현실의 자아는 온통 자책할 거리밖에 없는 낙오자(loser, 패배자)로 나타난다. (이는 동시에 조급증을 유발한다-지금 나의 현 상태)

 

p 128.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허상, 완벽히 자유로운 자는 혼자다. 도구이자, 부품이다. 그러기위해서라도 민주주의는 필요했다.

 

- 개인은 평등하지 않게 태어난다.

- 개인은 완벽한 자유에 따른 완벽한 책임을 등에 이고 살아야한다. 평생토록!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은 결국엔 누가 이끌어 줬으면 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 사람들이 서로를 도구 이상으로 느끼지 못하게 됨

 

"사색할 수 없게 만드는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1984의 세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 시대의 패러다임, 시스템, 매트릭스에 관하여, 外 자본주의가 무너질 수 없는 이유 >

 

 

 어째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거 같다. 고대 노예시대부터 산업혁명이 발발한 자본주의 태동기, 그리고 지금 정보화와 포스트모던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지금까지 역시 비참한 인생들은 늘 그렇게 존재해왔다. 그들에게 대체 프롤레탈리아 혁명이니 노동자를 위함이니 따위가 무슨 소용이었나? 그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다만 힘을 가지지 못한 지식인들이 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명분을 이용했을뿐...(물론 진실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것이다)

 

 나는 느낀다. 이제 조만간 보이지 않는 광풍이 불어올것이다. 너무 모든것이 미쳐돌아가고 있다. 나 조차 간신히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종합하고 있는데, 너무 빠르다. 지금이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기이다. 정규분포의 끝자락,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마치 자본주의 태동기의 폭발적인 생산성으로 인한 극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지금 현대의 정보화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모든 사람들처럼... 현대판 춘추전국시대... 모든것이 재편되는 시대... 군웅이 할거 하는 시대다. 누가 패권을 잡을지는 모르나, 한가지 확실한것은 그 모든 피해는 약자들이 지게 되어있다는점이다. 지금 모든 나라가 돈을 정말 말도 안되게 풀고있다. 왜 돈을 푸냐면 일차적으로는 경기부양이겠지만 이차적으로는 상대나라를 조지기 위해 푸는것이다. 돈을 풀면 상대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가치를 뜯기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 이시대는 칼로써 하는 전쟁이 아니다. 돈으로써 화폐로서 하는 보이지 않는 지적인 두뇌전쟁이다. 금리와 환율조작으로 상대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시대다. 그러니 서민들만 치솟는 물가에 보이지 않는 착취를 당하는 구조가 현 자본주의인것이다.

 

 사실 자본주의는 절대 없어질수는 없다. 왜냐면 이것은 인간본성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물려있기 때문이고(힘의논리가 이렇게 교묘하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난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자본주의 산업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쪽이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마치 기계처럼!(부품하나가 작동을 멈추게 하는것처럼, 미국의 금융위기가 유럽의 재정위기를 촉발하고 또 이것이 다른위기를 촉발시키겠지...지금 땜빵식으로 돈을 막대하게 풀지만 오히려 이럴수록 상처는 곪을 뿐이다. 위기를 초래하게 했으면 그 대가를 치뤄야 한다. 이 유동성 장세는 오히려 장기 불황을 유발할 뿐이다. 그리고 항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 그 희생양이 되는건 일반 백성들이지 언제나... 위기를 일으킨놈들은 지들이 일으켜놓고 세금으로 복구하면서... 뭐 나라가 망한다느니 뭐니하는 선전성문구를 남발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미 우리가 자본주의에 찌들어있다. 거의 우리 모든 세대가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것들이 너무나 익숙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계가 금본위제가 폐지된 시점부터 이미 사기라는걸 모른다. 돈의 본질을 모른다. 진짜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딱 들어맞는말,

 

'이 세상의 모든것은 구라위에 존재한다'

 

 파스칼도 왕권의 신성함이 거짓위에 존재한다고 했다. 마치 왕도 똥을 싼다는것처럼 우스꽝스럽다는걸 백성이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것이 권력의 핵심이니 말이다... (사실 이걸 아는 백성도 있지만 프롬의 '자유로부터도피'처럼 백성이나 군중이나 대중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학대하길 바란다. 참으로 오묘한 본능이다. 아마도 이건 누군가를 숭배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비뚤게 나간것일게다...하나님을 숭배하는것에서 어긋난 본능...)

 

 

어쨎든 이 모든것들을 다시 되돌리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혼자서 외칠수 있는가? 누가 당신말을 듣겠는가?

그리고 설령 듣는다하더라도 그게 가능하겠는가?

 

되돌릴순 없다. 자본주의가 멈춘다면 세계는 돌아갈수가 없다.

 

이것은 피할수 없다.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 매트릭스를 이길수 있는 진리의 빨간약은 대체 무엇일까?

예수님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논리일까? 거래가 아닌, 비즈니스가 아닌, 보드리야르의 선물의 논리인가?

내가 죽고 남이 사는, 한알의 밀알이 아무 대가없이 떨어져죽어서 열매를 맺는것인가? 희생의 논리인가?

 

 우리는 반드시 욕망해야만 한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돌아간다. 반드시 욕망을 자극해야 수요가 발생하고 그래야 돈을 쓰고 경제가 돌아간다. 이미 오래전부터 욕망을 긍정하는 들뢰즈의 철학이 이것을 예고했었다. 우리는 대체 이제 무엇을 더 욕망해야 하는가? 이제 새로움자체도 지겹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 창조성에 대한 집착도 토할것 같다. 이 미친 자본주의는 대체 어디까지 성장해야 이 광기를 멈출것인가?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점점 더 삶은 비참해진다. 우리나라도 모든게 부숴지고 있다. 해체되고 있다. 가족이 교회가 학교가 모든 곳에 힘의논리가 없는 곳이 없다. 사람들은 이제 자기 자신까지 붕괴시키면서 성장하려한다. 자신의 인간성이나 부모자식까지 제물로 삼아서... 이건 마치 파우스트와 같은 악마의 계약이 아닌가? 힘을 얻기위한 악마의 계약...

 

 피로사회처럼 이제 스스로착취 자가착취하는 시대까지 왔다. 성공신화, 긍정적인것까지 예술, 철학, 심지어 인문학까지 상품화 되었다. 이제 더 상품화 할것이 남긴 한것일까? 상품화 할게 없으니 당연히 청년 실업자가 늘고 선진국 경제가 침체되는게 구조적으로 피할수 없음이 분명하다. 유럽을 봐도 벌써 극우가 모습을 점차 드러내고 있다. 모든 사회가 불만에 차있다. 선진사회 청년들 대부분이 자기는 부모세대보다 미래가 암울할것으로 스스로를 점치고 있다. 자살률과 저출산율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것의 결과다.

 

 상품화 할것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진다. 따라서 이제 거의 끝자락까지 왔지만 조금더 지속될것이다. 아직 중국내륙과 아랍권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이 개발안된곳이 있으니... 그러나 그곳들마저 모두 개발이 된다면 이제는 정말 주님이 오실 차례신가?

 

 

 

< 21C의 시대정신 : Capitalism, Technology, Mass Media >

 

 

 

"자본은 생산성을 부추기고, 기술력은 미디어를 타고 더 큰 파급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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