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고로드의 재판
엘리 위젤 지음, 하진호.박옥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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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트 또는 흑야로 유명한 엘리 위젤의 희곡이다. 예전부터 위젤의 책들을 읽고 싶어도 국내에 발간된 것이 많이 없어서 아쉬웠었는데, 포이에마에서 오랜만에 좋은 책을 낸 것 같다. (요즘 이 출판사를 매우 눈여겨 보고 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삼고로드란 마을의 여관주인과 웨이터 마리아, 연극악단 유대인 3명과 개신교 성직자가 신을 피고로 세우고 신을 재판하는 내용이다. 여관주인은 신의 유죄를 묻는 검사 측을, 그리고 어떤 한 젊은 나그네는 모두가 떠넘긴 신을 옹호하는 변호사 측을 맡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신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품고 있는 주인공 여관주인이다. 이 사람은 그 사건이 있기전 매우 경건한 유대인이었으며 언제나 신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술집에 놀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또 그는 그의 아내와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무리들이 마을을 약탈하고 유대인 살육을 시작했다. 그는 술집의자에 묶인채 자기 아내와 딸은 침입한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하는 모습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그는 울면서 절규하며 신에게 부르짖는다.


 '주여 우리를 제발 구원하소서!'


 그러나 신은 어디에도 없었고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주인공을 맞는다. 그러는 그를 보고 약탈자들은 크게 비웃는다. 결국 저항하다 아내는 무참히 살해당했고, 딸은 정신병자가 되어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삼고로드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버렸다.


 그는 생각한다. 왜 신은 그 상황을 그저 지켜보면서 방관하였는가? 그는 우리를 분명히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우리가 고통에 차 절규하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디스트인가? 여관주인은 더이상 웃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냉소와 하늘을 향한, 신을 향한 맹렬한 분노뿐..


 여기서 바로 젊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 사람은 매우 침착하며 감정이 없는, 그리고 날카로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사람이다. 그는 여관주인의 모든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궁지에 몰아넣는다. 방청객인 다른 유대인들조차 이제 이 나그네가 신의 대리인이라고까지 하며 그의 의견에 동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을 옹호하는 바로 그 젊은 나그네의 정체가 사탄으로 밝혀지며 막이 내린다.


 작가는 아무리 인간사의 모든 부조리와 비극이 비록 그것이 온갖 현학적인 설명으로 논박이 가능하더라도 그 인간의 비통한 심정 자체를 공감하지 못하는 비인간성이 바로 사탄이라고 정의한다. 슬픔과 비탄에 빠진 사람에게 욥의 친구처럼 이것저것 잣대를 들이대며 괴롭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말보다는 그저 안아주고 위로와 공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어떠한 말을 갖다붙여도 설명이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논박이 가능하다. 일차적으로 그 죄는 강도가 저지른 것이지 신이 저지른것도 아니며, 신의 뜻도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또한 그들은 사실상 신이 복을 줄때만 나에게 의미있는 신이라는 실용주의의 신, 기복신앙의 신일 뿐이다. 잘 생각하면 그것은 댓가의 신이며 거래의 관계이다. 신은 진정한 사랑,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그것이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더라도 나를 사랑하느냐'와 같은 사랑을 바라신다. 마치 저 여자가 나의 돈과 힘을 사랑하는 건지 혹은 저 남자가 나 자체보다 내 외모와 껍데기 육체, 몸매만을 원하는 건지 의심하고 고민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기독교의 신은 가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미친 명령까지 한다. 너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너의 가장 사랑하는 100세 이후에 가진 첫 네 소생까지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하느냐?


 비신자들이 볼때는 이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짓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너의 어미와 친척 형제들 싹다 버리고 나만 따르라고 예수가 명령한다. 물론 이는 하나님이 참 행복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가족보다도 더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버리면 모두가 죽지만 내가 진리를 받아서 내 가족까지도 진리로 이끌면 모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절벽으로 달려가는 가족들을 말리려면 내 말을 들어야 한다'와 같다. 그들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그들을 먼저 버리라는 모순적이지만 역설적인 진리를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신이 가끔씩 우리 인생에 작은 일에도 개입하는데 왜 저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는 있지도 않은 듯,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아무 개입이 없냐고 한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그럼 신은 자기 맘이 가는대로 개입하기도 하고 비-개입하기도 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은 기계의 사랑을 원한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그것에 따른 필요악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죽을때도 왜 우리를 죽게했냐고 따지거나, 세월호가 침몰할 때마다 신은 그것을 막아야하며 심지어는 '세계대전을 왜 안막았습니까?'처럼 끝없이 따져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도 신을 완벽히 유죄로 몰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신은 또한 우리의 믿음과 단련을 또는 믿음의 시험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도록 우리에게 고난을 주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채찍이나 사랑의 매일 때도 있다.


 자, 그러면 실제 저런 상황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것이 신의 뜻이니 잠자코 받아들이라며 그를 몰아붙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 고통과 역경과 부조리와 비극을 직접 맞은 사람에겐 그딴 소리가 얼마나 다 헛소리고 개소리로 들리겠는가? 나같아도 누군가 그렇게 군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 사람과 신에 대한 분노와 증오만 커져갈 것이다.


 나도 이렇게 머리로는 그저 머리와 짱구로는 다 납득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내가 저 상황에서 정말 나는 그렇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욕하고 저주하며 온갖 분노를 표출했을 것이다. (주여 그저 나약한 나를 붙드소서! 나약한 우리 인간을 용서하소서)



 저명한 소설가 조성기의 야훼의 밤에서는 주인공이 사랑하던 여인이 선교하러 선교지에 갔다가 흑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귀국하게 되는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위젤의 나이트에서도 아우슈비츠 교수대에서 목이 졸려 바둥바둥대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며 누군가가 말한다.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도대체 우리의 하나님은 어디있는가?'


(심지어 그 아이는 어린아이라 가벼워서 오랜시간 뒤에 혀가 흘러내리며 죽었다)

- 이후 이 광경을 목격한 위젤은 완고한 무신론자로 돌아선다.


 

 이 모든게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서 당신 자식이 저렇게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다면? 혹은 내 딸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간 선교지에서 집단강간을 당하고 미쳐버린다면? 당신은 과연 당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한번 당신 마음에 물어보라 우리가 만약 삼고로드의 여관주인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래도 신을 꾸준히 사랑하며 '신은 숭배받기 합당하신, 지당하신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여라'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욥의 친구들 처럼 멀찍이 떨어져서 저 여관주인에게 온갖 신학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을 들이대며 신을 원망하는 그를 나무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당신이 저 상황에 처한다면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옳다며 정당화 시킬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당신이라면 저 필리핀 소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줄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리핀 방문 마지막 날인 18일 마닐라 산토토머스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교황은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다가 12세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울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하다 문득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왜 우리를 도와주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교황은 소녀를 안아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AP통신은 “교황은 너무 큰 감동을 받았다”며 “교황은 미리 준비한 영어 연설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시간이 지난 뒤 대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마약을 먹는 아이들, 집이 없는 아이들, 방치되고 착취당한 아이들, 사회가 노예로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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