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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기억 - 한국의 자본시장은 어떻게 반복되는가
이태호 지음 / 어바웃어북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동학개미들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42,000원 선까지 밀려나며 삼만전자가 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던 삼성전자의 주가는 오늘 장중 50,000원을 돌파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는 다른 종목에 비하면 오히려 덜 오른 편입니다. 1400선까지 밀려났던 종합주가지수는 2020년 4월 23일 기준 1900선을 돌파핬습니다. 주요기업의 시장가치를 반영하는 종합주가지수가 상승했다면 기뻐할 일이 맞겠지만 불안과 걱정의 목소리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상 '개미'가 시장에서 승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과연 1개월 뒤 우리 증시는 어떤 모습일까요? 지금의 추세대로 2000선을 돌파해 있을까요? 아니면 지루한 횡보장을 오가고 있을까요? 일각의 우려대로 폭락을 맞이해있을까요? 미래를 예측하려 할 때 우리가 반드시 참조해야 할 근거자료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의 기록입니다. 한국의 자본시장이 어떻게 움직여왔는지를 보여주는, '시장의 기억'입니다.
책 <시장의 기억>은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담은 책입니다. 자본시장의 태동부터 최근의 비트코인광풍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본시장에 일어났던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쌀 선물시장, 1950년대의 국채파동, 1978년의 건설주파동, 여의도 증권가시대의 개막, IMF구제금융, 5대그룹 빅딜 프로젝트, 대우그룹 워크아웃, 2003년의 신용카드 사태, 2004년의 적립식 펀드 열풍, 2006년의 부동산 광풍,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의 저축은행 사태, 2013년의 동양그룹 법정관리 신청 등 경제영역을 넘어서 대한민국의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던 주요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감동적인 드라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다. 따분한 전문 용어가 흥미를 떨어뜨리고, 사건을 바라보는 천차만별의 프리즘이 정작 의미 있는 흐름과 맥을 흩뜨리는 탓이다. 두뇌는 이야기 구성을 갖추지 못한 사건을 오래 저장하지 못한다. 딱딱한 분석 위주의 보고서나 경제 서적이 쉽게 잊히는 이유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 적힌 저자의 견해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구절이었습니다. 수치와 도표, 그래프로 이루어진 경제서적은 낯설고 어렵습니다. 어느정도 경제지식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가공된 자료들이 친숙하고 유용하겠지만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재미도 없고 어렵기만 하죠.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맥락'입니다. '이야기' 입니다. 숫자의 이면에 감춰진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수치와 그래프도 익숙해지고 흥미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이 책, 재밌습니다. 저자는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부에서 근무하는 기자인데요, 그런 저자의 필력이 십분 발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딱딱한 '역사'가 아닌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저자의 문장력에 감탄했습니다. 경제지식을 쌓을 수 있어서 유익했고, 그것을 읽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워서 좋았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다 갖춘 독서였습니다.
203 "'빅딜'을 포함한 대기업 구조조정이 조만간 발표될 겁니다."
외환위기의 원흉으로 대기업그룹의 '과잉, 중복 투자'논란이 도마에 올랐던 1998년 6월 10일.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린 한 조찬 강연에서 폭탄 발언을 한다. 굴지의 대기업그룹이 빅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파트는 IMF사태로 일컬어지는 1997년의 외환위기를 다룬 파트였습니다.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원인도 알고 경과도 알고 결과도 알죠. 하지만 사람과 사건을 중심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는 정보를 읽을때와 달리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졌습니다. 흐름과 맥락이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정보가 이야기의 구성을 갖추자 머릿속에서 또렷한 기억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빅딜 이야기도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단지 주력업종에 집중하기 위해서 기업들이 사업체를 재배치한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A기업과 B기업이 사업체를 교환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말입니다, 평화로운 중고나라에서 핸드폰 하나를 거래하는데도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현실인데, 굴지의 반도체생산업체를 교환하는 일이 순탄할리 없을겁니다. 바로 지금의 SK하이닉스가 있기 전,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빅딜 사례입니다. 당시 컨설팅회사 아서디리틀의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전자가 통합주체로 결정되자 LG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설득하다 지친 금융감독위원회는 4일 뒤 금융권에 'LG반도체 금융 제재를 결의하라'는 팩스를 뿌렸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정부의 강압이죠. 이후 LG는 빅딜을 받아들이지만 이번에는 가격 협상이 문제였습니다. 거래는 하되, LG반도체를 얼마를 받고 넘길 것인가가 관건이 된 것이죠. 협상이 길어지자 다시 금융감독위원장이 나섭니다. "각자 최종 제시한 가격을 산술평균하자." 황당하고 뜬금없지요? 그런데 이것이 실현됩니다. LG는 애초 기대했던 돈보다 4조원 가까이를 받지 못했고 구 회장은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대부분 발참했다고 합니다. 반도체시자에서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의 SK하이닉스만 보자면 '성공한 빅딜'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오늘이 있기까지의 역사속 흐름을 살펴보니 다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단편적으로 '결과'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장참여 주체들 각자의 입장에 맞물려 흘러가는 시장의 역사를 따라가다보니,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볼때와 유사한 감정변화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학개미는 승리할까요? 다음달의 종합주가지수는 어떤 모습일까요? 역사는 반복되지만, 그런역사를 꿰뚫어보고 미래를 예측한 현자는 다른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기도 합니다. 저도 이번의 배움을 바탕으로 투자방향을 결정해보려 합니다.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를 만나봄으로써 교훈과 배움을 얻기를 기대하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굳이 배우려하지 않더라도, 이야기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