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을 돌보던 의사가 있다. 예방의학 연구소의 의료책임자로서 심장질환치료를 위한 '오니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환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어 삶의 기쁨을 발견하도록 도왔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몸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다. 샌드위치를 먹다가 말이다. 음식이 식도에
걸린 느낌. 의사의 직관으로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문제를 직감하고 마찬가지로 의사인 아내와 상의 후에 병원을 찾는다. 검진 결과는 식도암.
진단 후 18개월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75퍼센트에, 5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90퍼센트에 이르렀다. 그가 이른 시일내에 죽음에 이른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해보였다. 과연 그는 이 거짓말같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지금껏 그가 자신의 환자들에게 해왔듯,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을까? 병의 치유자인 의사로서 바라보던 세계와, 병의 당사자인 환자로서 바라본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삶을,
결과적으로 2년 2개월이 되었던 시간을 어떤 경험과 생각으로 채워나갔을까?
의사로서, 연구자로서, 구도자로서의 이야기
이 책 <인생이라는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법>의 저자 리 리셉설은 의사다. 위의 이야기는 그가 경험한 실제의
이야기다. 병의 치유자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52세의 나이에 식도암을 진단받는다. 누구나 두려워해 마지않을 '죽음'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불안해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정면에서 마주본다. 지금까지 삶에서 배워왔듯,
죽음을 앞둔 삶으로부터 배움을 얻고 성장을 이어간다. 이 책에는 의사로서, 연구자로서, 구도자로서 그의 긴 여정이 담겨있다. 책의 전반부는 암을
진단받기 이전까지 그의 삶과 세계관으로 이루어져있다. 중반부는 암진단 이후 저자의 내밀한 마음과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이 진솔하게 기록됐다.
후반부는 삶을 회고하며 저자가 정리한 세계관과 인생관이 담겨있다. 이따금 혼란스러워지고는 한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의문은
지나온 삶을 회의스럽게 하고 다가올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일상의 삶에서도 이러한데 죽음이 분명해지는 시점에서 나는 얼마나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될까? 하지만 저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삶을 대하는 그의 신념은 더욱 분명해져갔다. 진솔해서 인간적이며 담대해서 대단한 저자의 이야기는,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감사, 인생이라는 샌드위치에 풍미를 내는
법
55 감사는 작은 실천으로 큰 대가를 받는 방편이 되었다. 사실 그것은
삶이라는 샌드위치에 풍미를 내는 핵심 재료이다.
202 감사하기 연습은 현실을 마주보고 , 자신의 여러 면(내적 자아,
하나인 자아, 하위 인격들, 주변 사람들)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이해하고 포용한다는 의미이다. 자신과 타인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다는 뜻이고, 우리를 해친 사람에게 연민을 품는다는 뜻이며, 삶의 힘겨운 면을 인식하면서도 눈 내리는 어두컴컴한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작고 순수한 꽃잎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감사함은 희망의 궁극적인 표현이다.
저자의 삶을 관통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감사'다. 그는 암을 진단받은 이후에도 가족들의 마음을 걱정하며 '통제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동요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면서도 지금 여기에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간다. 그 담대함의
배경에 '감사'가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날마다 감사하기를 연습하며 자신의 관점을 조율해왔다. 그렇기에 다가올 죽음보다 남아있는 삶에
집중하며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감사일기'는 나 역시도 실천하고 있으며 삶을 대하는 관점을 바꿔준 고마운 기술이다. 때때로 마음같지 않은 순간들을 마주하며
마음이 요동칠 때, 그것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나와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려 애쓴다. 고마운 사람들, 고마운 일들, 그리고 이 사건이 나에게
전해주는 새로운 '의미'와 '성장'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리고 이번 독서를 통해 '감사'에 대한 관점을 또 한번 확장시킬 수 있었다. '사건'이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로서의 감사다. 나는 꽤나 회피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실패한 경험이나 나의 미숙한 요소를 떠올리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개선해준 것이 바로 '의미부여'다. 실패라는 결과가 아닌 성장이라는 과정으로 사건을 바라보니, 취약성이라는
결과가 아닌 성장요소의 발견이라는 과정으로 미숙함을 바라보니, 한결 부드럽게 그것들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의미'를 넘어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단순한 직면을 넘어 반가움마저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자의 감사는 그랬다. 현실을 비틀어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현실을 마주보고 자신의 그림자마저 이해하고 포용했다. 명과 암을 가리지 않고 지금까지의 삶과 자신의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 나아가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야말로 '희망'의 궁극적인 증거가
아닐까?
곁을 내어준다는 것, 함께 고통받는다는 것
212 나는 성난 채로 침대로 갔다. 수프도 필요 없었다. 텔레비전도 필요
없었다. 그저 아내가 나를 안아주길 바랐다. 다음날 나는 내내 성이 나 있었다. 케이시는 왜 내가 필요할 때 안아줄 수 없는 거지? 이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화가 가라앉자, 나는 나를 안는다는 것이 내가 아플 때 내 곁에 있는다는 뜻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를 안고 있다는
것은 나와 함께 고통받는다는 뜻이었다. 남편이 죽어간다는 뜻이었다.
책에는 암진단 이후 가족들에게 고백하는 과정, 마지막 가족 여행, 아내와의 갈등들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티비 프로그램과 관련된 아내 케이시와의 갈등이었다. 아내는 좋아하는 의학 드라마가 있었고 퇴근 후 거실에서 혼자 시청하고는 했다.
하루는 저자가 문득 아내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침실에 와서 안아주기를 부탁한다. 하지만 아내는 티비를 보고싶다며 거절했고 저자는 크게
화를 낸다. 우는 아내를 뒤로하고 혼자 침실로 돌아오게 된다. 나같아도 서운했을 것이다. 마치 티비는 중요하고 나는 중요하지 않은것처럼,
티비보다 하찮은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 속상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이내 아내의 마음을 짐작한다. 티비를 보는 시간은 당면한 무거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쉴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의 기회였다. 남편을 안아준다는 것은 남편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소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눈앞의 죽음에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나 역시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오해할 수 있음을 상기했다. 나의 회피성향으로 상대방에게 오해와 상처를 주었을
과거를 돌아보고,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달콤할 샌드위치를 위하여
29 진단을 받은 바로 그날 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는 걸
생애 처음으로 확실히 알았다. 더는 죽음의 두려움이 온갖 방법으로 우리 삶에 침투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죽음의 두려움은
생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지만, 다른 욕구들은-사랑하고, 행복을 찾고, 삶을 받아들이려는 욕구들은-이 생존의 욕구보다 훨씬 컸다. 나는 삶이란
그저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의사로서 살아온 긴 시간 동안 내가 그토록 경탄하던 환자들처럼 변해갔다.
죽어가고 있지만 충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이르든 늦든, 결국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유일한 예외는 진정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저자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도와왔다. 죽음을 앞두고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으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충만하며 생동감 있는
삶을 살아가는 환자들의 모습을 지켜봐왔다. 그러한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저자가 직접 그러한 삶을, 그러한 태도를,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지식이 경험이되고, 타인이 자신이 되는 저자의 여정은 배움과 영감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딘 오시니 박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조셉 캠벨의 말을 인용하며 경험을 강조한다. "나에게 믿음은 없다. 경험이 있을
뿐."이라는 문장이다. 저자에게 죽음은 삶의 일부였다. 그 자체로 경험의 대상이었다. 시도하고, 실수하며, 배움을 얻는 것이 삶의 기본적인
과정이듯, 저자는 눈앞의 죽음을 껴안으며 여전히 시도하고, 실수하며, 배웠다. 예전보다 더욱 담대하고 생기있게.
저자는 어려서부터 두려움이 많았던 자신의 성향을 고백한다. 나 역시 그렇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은 많지만, 새로운 경험을
향한 욕심은 많지만 기원을 알 수 없는 망설임에 주저하며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는 했다. 아마도 두려웠을 것이다. 실패가, 망신이,
좌절이, 시선이, 평판이.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 자체가 나의 발목을 묶었다. 그렇게 살다가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렇게 살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죽을 것이다. 죽음뒤에 무엇이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 곳에서의 경험들은 모두 기억과 추억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이 부끄러운걸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걸까? 적어도, 죽음보다 더 두려울 것은 없지 않은가?
저자의 말처럼 삶은 모험이다. 뛰어들자. 경험하자. 그리고 날마다 새로워지자. 일단 그보다, 눈앞에 놓인 샌드위치부터 온전하게 음미하자. 인생의
진짜 맛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