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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장례
윤이안 지음 / 아작 / 2022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뮬레이션 속의 지구는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뒤덮인 곰팡이 같았다. / p.9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 사이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 중 하나였다. 내 입장에서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모님의 연세가 비교적 젊으신 편이어서 굳이 생각할 이유가 없었고, 어머니께서는 이미 부모님을 여의셔서 마음 아프셨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도 크게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대화 주제가 되었다. 가끔은 이 지점이 많이 서글프다.
이 책은 윤이안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이다. 출판사의 마케터 님께서 어버이날 추천 도서로 이 작품집을 소개해 주신 글이 기억에 남았다. 그 문구가 실제로 엄마께서 나에게 하셨던 부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연명 치료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몸에 주렁주렁 달린 기계들을 보고 나중에 하신 말씀이었는데 내내 마음에 남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좋은 기회에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읽게 되었다.
소설집에는 총 여덟 작품이 수록되었다. 병에 걸릴 때마다 기억을 더미 신체로 옮겨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 장례식장에 인공지능 스피커를 가지고 오라는 유언을 실행한 조카, 목이 잘린 상태에서 저승과 이승 사이의 도서관에서 범인을 찾는 한 남자까지 SF 장르의 소설집이지만 전통적인 SF 장르부터 미스터리 장르를 경험할 수 있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술술 읽었지만 작품에 따라 편차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적으로 와닿는 주제를 가진 작품들은 쉽게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반면, 거리감이 느껴지는 작품들은 머릿속으로 내용이 그려지지 않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세계관이 흥미로워서 완독할 수 있었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번갈아 읽었는데 완독까지 네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한 호흡에 읽는 것보다는 끊어서 읽기를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어릿광대를 보내주오>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화자와 큰이모는 연락을 안 한 지 꽤 된 듯한데 돌아가시기 직전 집에 있는 인공 지능 스피커를 장례식장으로 가지고 오라는 유언을 듣는다. 인공 지능 스피커는 굉장히 말이 많았고, 상황에 따라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큰이모의 장례식 이후 재산 분할과 갑자기 화자를 찾아 온 전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가장 유쾌한 작품이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완독한 이후 엄마께 소설의 내용을 소개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강한 S 성향을 가지신 분이어서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이시기는 했지만 언젠가 돌아올 엄마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엄마와 함께 읽었더라면 더욱 풍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책과 거리가 먼 분이셔서 그 지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물꼬가 트였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