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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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언제나 다른 뭔가의 일부분입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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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소설을 읽을 때마다 현실에서 경험하기 싫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게 된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는 어느 정도 시청자들의 정신 건강과 모방 위험을 고려해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걸러서 보도된 사건들 중에서도 꽤 오래 잔상이 남기도 했는데, 소설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보니 자극적으로 느끼는 편이다. 그럼에도 자꾸 손이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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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M.W. 크레이븐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퍼핏 쇼>와 <블랙 서머>라는 작품을 SNS에서 종종 접했던 기억이 있다. 줄거리 자체는 흥미로웠지만, 장르 소설을 지금만큼 찾아서 읽을 시기가 아니어서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 작가의 신작 소식을 접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런 장르 소설들을 찾아 읽는 편이기에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감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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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형사 워싱턴 포다. 포는 데이터 분석가인 브래드 쇼와 합을 맞추어 여러 사건에 투입되었다. 모두가 설레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훼손된 시체와 함께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남겨졌다. 당연히 포와 브래드 쇼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로 하는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사건이 미궁에 빠질 때, '큐레이터'라는 별명을 가진 정체불명의 존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큐레이터가 이 살인 사건과 맺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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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은 쉬웠지만 낯선 배경이 걸렸던 작품이었다. 처음에 걱정했던 부분은 이전 시리즈와의 연계성이었다. 이번 신작으로 시리즈를 접하는 독자로서 전체적인 스토리가 이어진다면 따라가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독자적인 이야기로 봐도 될 정도로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반면, 드러난 영국의 문화적 배경이나 등장인물들이 다소 헷갈렸다. 이 지점만 적응이 된다면 괜찮을 듯하다. 스릴러 장르를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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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작품에 드러나는 살인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발견된 시체들의 살해 방식이 전부 다르다. 어떤 이에게는 교살 흔적이 있었고, 다른 이에게는 신체 훼손한 자국이 남았다. 지금까지 봐 온 범죄 프로그램의 시그니처와는 다른 결로 느껴졌다. 이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을 파악하는 형사들의 능력치에 감탄했다. 하지만, 방식을 떠나 활자로 묘사된 시체의 상태는 시각적으로 끔찍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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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재미로 읽기에는 개운하지 않은 무언가가 남는다. 이는 불쾌감이라는 감정이었다. 작품이 결코 아쉽다는 뜻은 아니다. 등장인물들이 머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기이한 모습으로 남겨진 시체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 사건들은 어디까지나 소설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아니, 소설 안에서도 이런 일은 없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인간의 악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지 내내 머릿속을 휘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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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청
차일린 지음 / 아작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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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그들의 무의미한 생이 끝나는 것뿐이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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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물음표가 뜨는 이 질문에 지극히 현실적인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쁘거나 괜찮은 물건을 사 주는 것과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될 듯하다. 마음 같아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너무 책임감이 없는 대답처럼 느껴진다. 말로는 뭔들 못하겠냐는 질책이 쏟아질 것이다. 그냥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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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주제로 온갖 기이한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은 차일린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이다. 출판사 소개부터 읽은 독자들의 서평까지 난해함을 안고 있어서 한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소설을 읽을 뿐인데 다짐 그 이상의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된다는 게 의문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의 동물이었다. 얼마나 심하길래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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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는 총 열 편이 수록되었다. 연인을 먹는 남자, 집단 난교를 하는 부부, 벽간 소음을 피해 반지하를 알아보는 레즈비언 커플, 자신을 스스로 절단하는 의사, 물감을 먹는 화가, 청각을 잃은 피아니스트에 이르기까지 조금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보통의 상식과 반대가 되는 사랑이나 소수자들이 주인공인 사랑도 있다. 소설들의 전반적인 내용은 우리가 쉽게 범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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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스토리를 떠올리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 다섯 가지 감각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읽는 속도는 더디게 흘러갔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심리적인 문제가 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터라 생각보다는 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잔인하거나 고어한 묘사가 읽는 내내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미성년자의 독자들에게는 주의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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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셋의 의미>라는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청소년인 자녀를 둔 중년의 부부다. 두 사람에게는 은밀한 데이트가 있다. 이는 집단적으로 난교를 하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과, 남편 역시도 다른 남자의 파트너와 성관계를 맺는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하지 않지만, 매번 같이 참여하는 것에 불만이 있다.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이야기 중 하나여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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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사랑을 과연 납득할 수 있을까. 일개 독자가 인정의 여부를 따질 것은 아니지만, 읽는 내내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게 유교 문화권에서 성장한 사람의 혼란일 수도, 경험할 생각조차도 없는 사람의 이질감일 수도 있다. 이렇게 멍한 느낌으로 소설을 읽은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이성적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연속이었으나, 허구의 세상에서 가능한 이들의 순애보로 남겨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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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5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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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무튼 유전자가 그토록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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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나 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어머니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좋은 것은 너의 능력이고, 나쁜 것은 무조건 유전이냐는 것이다. 작은 키와 없는 말수는 아버지의 유전이고, 단순한 생각은 어머니의 유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 또한 아니다. 남의 말을 쉽게 옮기지 않는 성향은 아버지를, 참을성이 강한 성향은 어머니를 닮았다. 능력보다는 유전이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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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바이블로 불리는 이 책은 리처드 도킨스 저자의 과학 도서이다. 말이 필요없는 비문학 계의 고전이 아닐까 싶다. 올해 독서모임으로 칼 세이건 저자의 <코스모스>를 함께 완독하고 있으며, 빠른 시일 내에 유발 하라리 저자의 <사피엔스>를 읽고 싶다. 그래도 책 좀 읽는다는 독자들이라면 자존심과 같은 책들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마친 100만 부 기념판으로 리뉴얼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페이지를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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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비롯한 생물들이 다양한 행동을 하는 것을 유전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로부터 시작해 유전자의 복제, 생물체의 공격성, 유전자가 행동하는 방식, 인간의 가족 계획, 암컷과 수컷의 생식, '밈', 선악 등 유전자를 마치 의인화해서 각 장에서 유전자 중심의 진화론적 관점으로 다양한 생물학적 현상과 행동을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행동과 문화 역시 이러한 진화의 틀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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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사실 읽기 전부터 난이도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고등학교 때 생물 과목을 배웠던 것과 현재 나의 지식 수준을 적어서 읽을 수 있는 책인지 AI의 판단을 묻기도 했다. AI는 충분히 완독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답했는데, 그 예상이 어느 정도는 적중한 것 같기도 하다. 전문적인 지식은 낯설었지만, 걱정했던 것보다는 이해가 되었다. 친절하게 풀어 쓴 지점이 만족스러웠다.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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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부모의 투자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부모가 자녀에게 투자하는 행동을 유전학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 부분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에 만연한 '남아선호사상'와 'K-장녀'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딸은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살림 밑천으로 여겨지는 사이, 아들은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게 되는 과거의 우리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을 유전학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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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윗 세대로부터 내려온 많은 정보를 담고 있었다. 인간의 생존과 개인의 행동에도 유전자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쳤다. 유전을 단순히 신체적 특성에 국한해 생각했던 시야를 조금 더 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문화와 환경이라는 변수 앞에 생긴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온전히 이해했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유전자의 영향을 풀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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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 타이거!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해도연 옮김, 듀나 해설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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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때문에. 당신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모두에게.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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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억하는 히어로는 세상을 구하는 인물들이다.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성들이라면 슈퍼맨과 배트맨을, 여성들이라면 원더우먼과 세일러문을 한번쯤 장래희망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세상물정 하나 모르는 유치원생 시절에는 그들을 동경 그 이상의 이상향으로 두었다. 성악설을 지지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조금이라도 따뜻했으면 하는 바람은 어쩔 수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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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히어로상을 깨부수는 이 책은 앨프리드 베스터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원래 상상력이 부족한 편이라 SF 장르를 자주 접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익히 들었던 SF 장르 소설 작가들의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관심이 생겼다. 특히, SNS에서 많은 호평 후기들을 읽었는데 속는 셈치고 도전하고 싶어서 선택하게 되었다. 부담감과 기대감 그 사이에서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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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걸리버 포일이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정신의 힘을 모으면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이 가능한 '존트'라는 이름의 정신감응 이동 기술이 상용화되었다. 포일은 우주선 노마드호에 탑승했는데, 사고로 우주에 표류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한줄기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보르가호. 구조 요청을 보냈지만, 야속하게도 보르가호는 포일을 그냥 버리다시피 지나가버린다. 그때부터 포일의 뜨거운 복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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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우면서도 난해했던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SF 장르 소설과 결이 많이 달랐다. 세계관은 넓고, 밀도는 농축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림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흥미로웠다. 이렇게 쉽게 이해가 되었던 작품이어서 '나 SF 작품 좋아하나?'라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오히려 인간의 심리를 파고드는 부분이 더욱 어렵게 다가왔다. 철학적인 느낌을 주는 장르 소설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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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포일의 복수심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출판사 소개에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히어로다. 편견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가 알던 '히어로'라는 개념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체감했다. 보르가호가 그를 태우지 않았던 이유를 들으며 인간의 잔인함에 분노했지만, 돌이켜보면 포일을 움직인 본질적인 이유는 잔인함이 아니라 버림받았다는 상처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포일의 그 영웅 심리는 지극히 사적인 복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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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히어로. 해설에서 등장하는 단어로, 영웅에게 기대되는 정의가 결여되거나 뒤틀린 인물. 포일의 행동이 결론적으로는 권력과 야망을 가진 이들을 격파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그의 의도는 결코 선하지 않았다. 인류애보다는 이기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과연 포일에게 안티 '히어로'라는 닉네임을 붙일 수 있을까. 어쩐지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영웅이 되어 버린 그의 모습이 페이지를 덮어도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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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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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요컨대 거스르는 것이 무서웠을 뿐이잖습니까.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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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도 종종 시간이나 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있는 곳, 그리고 하고 있는 행동이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불쾌한 경험이다. 뭔가 말로 형용하기 힘든 이 느낌이 '데자뷰'라는 것을 성인이 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심지어 나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감이 좋은 인간들이라면 자주 겪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혼란을 주는 데자뷰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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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을 뒤틀리게 만드는 이 책은 아베 고보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요즈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우스갯소리로 '입덕부정기'라고 표현하는 편이다. <모래의 여자>를 읽고 너무 불호였어서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았는데, 계속 잔상이 남았다. 그리고 다른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접한 <타인의 얼굴>은 그 기분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치 끊을 수 없는 중독 같았는데, 이번 신작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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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화자는 '안녕하세요 화성인'이라는 이름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작가다. 한때 인기를 얻었으나, 화성 탐사선이 발사된 이후로 자리가 위태한 상황이다. 그때 자신이 화성인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그를 찾아온다. 당최 믿을 수 없는 화자는 남자를 의심했고, 남자는 논리적인 언변으로 화자의 말에 반박했다. 과연 남자가 화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화자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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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렵게 읽었던 작품이었다. 아베 고보 작가의 문체는 쉽게 손에 잡히는 스타일은 아니다. 전체적인 문장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은유적으로 돌려서 구사한다. 비교적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문장 자체는 눈에 들어오지만,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속담처럼 은유의 밀도는 여전히 중상, 아니 그 이상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꽤 길었다. 문장을 비틀거나 곱씹어서 의미를 파헤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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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인간과 화성인의 차이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화자와 남자의 설전에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남자는 화성인을 '인간 판박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초반에는 겉모습이 비슷하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행동과 생각, 감정도 두 개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인식하게 만든다. 후반부에 화자가 남자에게 지리멸렬한 사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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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은 그저 까마득하다. 갈 생각도 없지만, 앞으로 갈 일도 없는 사람으로서 그곳에 외계인이 있을지 과학자가 밝혀주지 않는 이상 평생 모르고 살아갈 것이다. 화성인과 지구인은 같은 종족일까. 화성인의 주장처럼 인간 판박이일까. 아베 고보 작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SF 소설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인간을 탐구하는 사회학 소설로 읽혀졌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혼란스러움이 페이지를 덮고 나서도 머릿속을 어지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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