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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화바이룽 지음, 김소희 옮김 / 서사원 / 2026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어쩌면 당신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감정이 죽은 걸지도 몰라. / p.28
이 책은 화바이룽 작가의 장편소설이다. 예전에 추리 소설의 대가인 찬호께이 작가의 <13.67>을 인상 깊게 읽었다. 이후로 그만큼 기억에 남았던 대만 작품은 없었던 듯하다. 부커상을 수상했던 양솽쯔 작가의 <1938 타이완 여행기>와 <꽃 피는 계절>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최근 이 작품의 발간 소식을 알게 되었다. 언급했던 두 작품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택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정팡이다. 남편 밍런과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밍런이 어느 순간부터 냉담한 모습을 보이면서 부부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정팡은 밍런과 대화로 풀기를 원했으나, 밍런은 소설 속 코끼리를 예로 들어 이혼을 요구한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듣고 새로운 애인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측한 정팡은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 몰래 남편을 미행하게 되는데 밍런이 살해 혐의를 받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술술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타이완의 지역 명칭이나 문화가 자주 등장해서 낯설기는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스토리의 흐름을 이어가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장르 소설에 속하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심리 변화에 따라 진행되는 작품이어서 감정선에만 몰입한다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3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작품이었고, 완독까지 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복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밍런이 정팡에게 이혼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인간에 대한 감정이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슬며시 흘린다. 초반에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좋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단지 정팡에 대한 밍런의 감정이 큰 이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볍게 흘렸던 그 중얼거림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었다는 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허투루 흘린 문장의 중요성을 이제야 깨달았다.
더불어, 결혼이라는 굴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은 흔히 의리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감정이 식었다는 이유만으로 파기할 수 있는 계약일까. 아이를 양보하지 못하는 시댁과 가정에 무책임한 밍런의 모습이 국가를 떠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결말에 이르러 두 사람의 이혼 이유가 등장하는데 충격이었다. 아니, 밍런에 대한 연민마저 날려버릴 수 있는 거대한 한 방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사유여서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혈육이라고 해도 등을 돌리게 될 문제인데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배우자의 허물이라면 어느 선까지 안을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았다. 평소 성향이라면 윤리적인 문제에서 냉철하게 인연을 끊게 될 것 같지만 이 또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의 근거 없는 대답일 뿐이다. 감정을 무 자르듯 쉽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 나 역시도 정팡의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