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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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에서는 탁류가 요란하게 소용돌이치며 흘러갔다. / p.21

세상이 멸망되는 이야기나 이를 구원하는 이야기들은 종교적으로 들리기도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현실감을 준다. 특히, 세계가 혼란스러움에 빠질 때에는 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그저 하나의 허구로만 가볍게 넘겼는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그런 주제를 가진 작품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 책은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이다. 작가님의 이름은 자주 들었지만 작품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일본 작품들을 읽는 비중이 꽤 높음에도 주변에서 호불호가 참 많이 갈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감성을 건드리는 인생 작품이 되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호기심이 들어서 읽게 되었다. 심지어 연재 기간만 14년이 걸린 대작이라고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나치라는 이름의 소녀이다. 혼자 어머니의 고향인 이와쿠라에 도착한 나치는 그곳에서 사촌 오빠와 친척들을 만난다. 그런데 변질체가 되어야 한다는 둥, 허주의 선원이 되어야 한다는 둥 알 수 없는 말을 꺼내는 사촌 오빠. 가족들에게 사전 정보를 얻지 못했던 나치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나치는 영문도 모른채 허주의 승선원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허주의 선원은 변질체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의 피를 먹는 '피먹임'이라는 의식을 치루어야 된다는 것이다. 나치는 피에 대한 강렬한 끌림을 경험하면서도 타인의 피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둘러싼 비밀, 이와쿠라 마을에서의 허주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과연 나치는 이러한 비밀들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변질체가 되어 영생을 누릴 수 있을까.

초반에는 두꺼운 페이지 수이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장편으로 이루어진 작품 자체에 부담감을 느끼는데 거기에 SF 장르라고 하니 더욱 무거웠다. 그러나 우려와 다르게 초입부터 강렬하게 몰입이 되었다. 특히, 나치의 시선으로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마치 독자가 허주의 승선원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렇게 읽다 보니 금방 완독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뱀파이어를 소재로 한 영상 매체들을 종종 봤었는데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사람들의 피를 노리는 존재로서 무서움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때 큰 인기를 누렸던 뱀파이어 영화 역시도 보다가 중간에 끊을 정도로 재미있는 주제가 아니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은 어떻게 보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부모에게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그동안 보았던 뱀파이어와 다르다는 점에서 색다르게 보였다.

읽으면서 뱀파이어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뱀파이어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연민이 느껴졌다. 여전히 뱀파이어는 사람에게는 해악을 주는 이미지이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뱀파이어는 영생을 준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이익을 주고, 피먹임을 하는 의식 또한 필요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식사를 하면서 생명을 유지하듯 그들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피를 노리는 본능은 아닐까. 물론,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부터는 죽을 수 없는 삶을 산다고 해도 말이다.

SF 소설이기는 하지만 판타지에 가까운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허주와 이와쿠라 마을, 나치가 변질체가 되어가는 과정 등 하나하나 상상하면서 읽다 보니 색다르게 와닿았던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인류가 살 수 없는 환경에서 허주의 선원이 되어 이동하는 이야기들은 종교적으로, 활자로 읽는 장미의 향기는 신비로웠다. 전체적으로 색다른 상상력을 안겨 주었던 책이었으며, 묘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14년의 장미향이 느껴졌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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