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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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렌은 다시 눈을 감았다. / p.18

예전에 소설의 내용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것도 추리 장르의 소설이었는데 나름 인상적으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후로 종종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에서 그대로 사건으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겼다. 물론, 추리나 스릴러 장르에서의 단골 소재인 살인과 범죄 이야기는 허구로만 남았으면 하는 사건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등장한다면 조금 놀랄 것 같기는 하다.

이 책은 앙투안 로랭의 장편 소설이다. 익명 소설이라는 제목에 흥미를 가지고 읽게 된 책이다. 사실 소재 자체는 나름 자주 접하는 줄거리여서 크게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익명의 작가가 쓴 이야기라는 점이 어떻게 사건으로 전개될지 그 지점이 궁금했다. 거기에 스릴러 장르인 만큼 긴장감 있는 전개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비올렌으로 출판사의 원고 검토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어느 날, 그곳으로 소설 투고 메일이 도착한다. 제목은 설탕 꽃들이었으며, 네 명의 남자를 죽이는 내용이다. 원고를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히트를 예감했던 비올렌은 소설 투고자와 접촉하기 위해 만남을 요청하거나 개인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지만 이를 거절한다. 결국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수단은 메일 주소 하나뿐이었으며, 계약서도 런던으로 우편을 보내 달라고 했다.

이후 소설은 발간되었고, 예감은 적중했다. 설탕 꽃들은 크게 성공했으며, 문학상 중 하나인 콩쿠르 상의 후보에도 오르게 된다. 후보로 오르면서 콩쿠르 상의 담당자와 여러 사람들은 작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다. 당연히 원고를 검토했던 비올렌에게 이러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그때마다 비올렌은 난감함을 느낀다. 거기에 소설의 내용처럼 남자가 살해되고 있다는 경찰의 주장도 등장한다.

처음에는 설탕 꽃들 작가의 정체에 대해 나름 추리를 하면서 읽었지만 페이지 수가 넘어갈수록 스릴러라는 장르보다는 개인의 서사에 더욱 몰입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특히, 비올렌의 연대기가 펼쳐졌다는 점에서 추리보다는 주인공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얇은 페이지 수에 나름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등장하다 보니 어렵지 않게 완독할 수 있었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은 지점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공간적 배경이다. 익명 소설가의 시점에서 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예상을 가지고 읽었는데 결론적으로는 출판사 직원의 시점으로 전개가 되어서 이 부분이 새롭게 느껴져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출판사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 드라마가 떠올랐는데 그동안 몰랐던 책이 발간되어서 나오는 내막을 이 작품을 통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주인공이다. 비올렌의 이야기 위주로 흘러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이입해서 보았는데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아온 듯하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갔던 부분이 있었다. 우선, 비올렌은 비행기 사고로 신체적인 장애를 얻었음에도 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퇴원한 다음 날 바로 출근한 모습만 봐도 그렇다. 거기에 대형 출판사의 원고 검토부 책임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부단한 노력을 했었고, 직원들 사이에서 이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직업 의식과 책임감에 대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추리나 스릴러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아마 실망감이 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자신한다. 특히, 프루스트와 스티븐 킹 등 익숙한 작가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해 반가움을 느꼈고, 마지막에 이르러 사회적인 문제를 하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 지점이 가장 여운을 남겼다. 역시 상처는 평생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장르를 떠나 나름의 무게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뇌리에 오래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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