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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24
민지형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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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 보고 싶은 곳. 여러분에게도 그런 곳이 있으신가요? / p.16
즐겨 보는 드라마에서 "망각은 신의 배려가 아닐까요?"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어렸을 때에는 기억력 좋은 것이 나름의 자랑이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다른 이들에 비해 작은 것 하나까지도 기억해 노력 대비 더 나은 결과를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꼈다. 보통 한 시간을 공부한다고 해도 적어도 주변 친구들에 비해 점수는 월등하게 잘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위권을 달리는 정도의 수재는 아니었지만 공부하는 것만 보면 하위권을 맴돌았을 텐데 중상위권까지는 그냥 올라갔다는 점에서 나름 기억력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부터 기억력 좋은 것이 비단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가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업무를 하면서 실수를 한다거나 스스로 이불을 발로 차고 싶을 정도의 창피한 일을 했을 때 그 기억들이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그냥 좋게 잊고 새로 시작해도 될 일을 계속 이를 곱씹으면서 생각하다 보니 어떠한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나도 모르게 과거의 실수가 떠올라 주저하게 된다. 그때 본 저 대사가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망각 또한 신의 배려라고 한다면 제발 삼십 넘게 했던 나의 실수들도 모조리 망각의 자리에 넣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다.
이 책은 민지형 작가님의 장편소설이다. 오픈 릴레이션십이라는 주제로 친구들과 토론을 끝도 없이 하게 되었던 <나의 완벽한 남자 친구와 그의 연인>과 그동안 신레렐라라는 편견을 새롭게 깨게 해 주었던 <신데렐라 프로젝트> 등 트렌디한 주제의 작품을 집필하시는 작가님으로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다. 이번에 신작 소식을 접해서 나름 큰 기대를 하고 읽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재이라는 인물이다. 부잣집의 가사 도우미로 살아가는 재이는 라이프 랜드 스케이프라는 이름의 기계를 하나 알게 된다. 입이 크게 벌어질 정도로 고가인데 사람들의 기억을 저장해 이를 체험하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일하고 있는 집에서 그 기기를 구입했는데 재이는 이 기기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던 중 사모님께서 남편을 살해한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사모님 역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기기가 원인이 되어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라이프 랜드 스케이프를 만든 리사는 재이를 찾아가게 되고, 재이는 본의 아니게 사건과 기기의 중심이 되었다.
그동안 읽었던 작가님의 작품과 다르게 장르의 냄새를 맡았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기억을 주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라이프 랜드 스케이프로부터 과학과 기술의 느낌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SF 소설을 나름 자주 읽는 사람으로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고, 요즈음 기술 발전 속도로만 보더라도 곧 다가올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와닿는 부분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개인적으로 단 한 가지의 생각이 관통했다. 이는 사회적 문제이기도 한데 성범죄에 대한 부분이었다. 초반에는 라이프 랜드 스케이프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어느 정도 이야기의 흐름이 리사의 아버지로 이동한다. 읽으면서 가장 이슈가 되었던 사이버 성범죄와 클럽과 관련된 성범죄의 기사가 결합이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몰입도가 높았으며, 그 지점이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먼 나라의 일은 아닌 듯했다. 이렇게 늘 사회적인 화두를 하나씩 던지는 작가님의 스타일처럼 이 작품에서는 성범죄가 크게 와닿았다.
아마 늘 그랬던 것처럼 작가님의 작품을 읽고 나니 한동안 머릿속에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와 더불어 망각이라는 게 신의 배려이자 축복이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랫동안 기억해야 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바로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잔인함을 주는 기억이지 않을까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