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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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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의 유대는 공기보다 가벼웠다. / p.77
영상 매체 원작 소설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무래도 영상과 활자를 비교해서 보는 재미를 크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싶다. 모르는 작품이어도 시선이 고정되는데 이미 영상으로 봤던 작품이라면 더욱 몰입한다. 머릿속에 명장면들이 펼쳐지면서 이를 글로 다시 느끼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온다. 읽을 책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중에도 그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게 병이라면 병인 듯하다.
이 책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단편 소설집이다. 책을 고른 이유는 가장 눈에 들어온 영화 한 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추천을 많이 받아서 보았던 캐롤이었다. 영상미가 뛰어난 작품을 좋아하는 터라 인상이 강하게 남았는데 소설로 읽기 위해 당시 구매까지는 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아 방치하다 결국 중고 서점에 팔았던 기억이 있다. 캐롤의 작가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을 읽고 취향에 맞는다면 캐롤도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읽게 되었다.
책에는 몇 장 정도의 소설부터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소설까지 다양한 분량의 소설 총 열여섯 편이 실려 있다. 인상에 깊게 남는 작품도 있었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작품도 있었다. 특히, 초반에는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꽉 막힌 결말을 선호하는 편이기에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마무리 방식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읽으면서 물음표를 내내 달았던 것 같다. 어느 정도 스타일을 인지한 이후부터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소설을 즐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초반에 실린 작품보다는 중후반에 실린 작품에 마음이 갔다. 그 중에서도 <시드니 이야기>, <영웅>, <달팽이 연구자> 세 작품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꽤 흥미로웠다. <시드니 이야기>는 시드니라는 이름을 가진 거미 이야기이다. 시드니는 매일 파리만 주는 어머니께 반찬 투정을 하다가 독립을 선언해 다른 곳으로 떠난다. 떠나는 순간에도 어머니는 시드니에게 파리를 주었는데 젊음의 패기인지 그것조차도 거부하면서 큰 거미줄을 친다. 먹이를 기다리고 있던 시드니에게 사건이 펼쳐 진다. 수록된 작품 중에서 짧은 분량의 소설인데 공감은 가장 크게 되었다. 자수성가로 성공한 해피엔딩이 아닌 불완전한 준비로 부모님을 떠나갔던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독립을 그렇게 바라던 어린 시절 생각도 들었다.
<영웅>은 시골로 취업한 한 가정 교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가진 광적인 병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음에도 광기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불안함을 가지고 시골의 한 부자 저택으로 취업한다. 그곳에서는 두 아이와 친절한 부모가 있었다. 그곳에서 가정 교사를 하면서 무엇보다 열심히 아이들을 돌본다. 주인공은 광기를 경계하면서도 보통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된다. 가장 섬뜩했던 작품이었는데 처음에는 주인공의 마음이 와닿았다. 가족이 없는 자신에게 일거리와 돈, 거처를 제공하는 고용주에게 충분히 감사함을 느끼고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반에 이르러 주인공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의사의 말이 진짜인지 의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의 행동이 곧 돌이킬 수 없는 연극 무대을 꾸미는 배우처럼 느껴졌는데 이상하게 현실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팽이 연구자>는 달팽이를 키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달팽이가 교미하는 모습에 반해 서재에서 달팽이를 키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달팽이에게 집중해 교미를 보거나 연구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가족들은 밟게 되거나 냄새가 난다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결국에는 이 또한 포기했다. 결국 서재가 곧 달팽이의 방이 되었다. 주인공의 일이 많아지면서 달팽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아내는 서재를 들어가보라는 말을 한다. 아이돌이나 책 등 무언가에 미친듯 몰두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조금은 다른 광기로 느껴졌던 작품이었다. 특히, 결말이 참 충격적이었는데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에 몰두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성공의 초석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니 이성까지도 지배가 된다면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교훈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밖에도 신비로우면서도 어두운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파멸과 욕망, 광기 등의 어두운 면을 확 이끌거나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어서 여러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원래 어두운 소설 자체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철학적인 물음과 인간에 대한 질문들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어서 좋았다. 어둡다고 해서 무조건 우울하지 않다는 증거를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상상력이 활자로 표현된다면 이 소설이 떠오르게 될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