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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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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지금까지 저런 것들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는가? / p.306
장르 소설을 읽다 보면 유명한 작가님들의 소설을 꼭 읽고 싶다. 그런데 의외로 유명한 소설을 크게 읽을 일이 없다. 가령, 추리 소설이라고 하면 애거서 크리스티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다른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아직까지 읽지 못했다. 일본 작가 중에서도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보다는 다른 소설들을 찾아서 읽게 된다.
이 책은 듀나 작가님의 SF 단편 소설집이다. 얼마 전 듀나 작가님의 추리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SF 소설 인터뷰집을 통해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SF 장르 소설은 첫 도전이다. 거기에 기존에 집필하셨던 소설의 개정판이라고 하니 더 큰 기대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초반에 수록된 작품들이 가장 흥미로웠다. 가장 먼저 수록된 <동전 마술>은 동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개팅에 나온 남자 주인공 정기에게 여자 주인공 민영은 동전 마술을 하나 보여준다. 백원짜리 동전을 천장을 향해 던졌는데 동전이 사라졌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묻자 일정한 시간에 던지면 사라지는 마법이라고 했다. 정기는 민영을 만났던 장소를 지나가다 똑같이 올렸는데 동전은 그대로 떨어졌다.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는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인경은 어느 날부터 남자 친구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보인다. 손으로 잡으려고 했으나 잡히지도 않는다. 이러한 일을 포털 사이트에 올리니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같은 일을 경험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모이게 되었는데 인경 또래의 여성들이다. 점점 갈수록 사람은 늘어났는데 이 사람들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비밀이 있었다.
<A, B, C, D, E & F>는 온라인에서 만난 두 남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A라는 사람은 B라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한 듯하다. 어차피 만나지 않을 사이이기 때문에 A는 조금씩 자신과 동떨어져 꾸미기 시작했으며, B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C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관계가 안 좋게 흘러가면서 D와 E 등 새로운 인물들을 자꾸 만들어낸다.
전반적으로 세 작품 모두 신비로우면서도 의문이 들어서 좋았다. <동전 마술>과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는 어떻게 보면 기이한 일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날 것처럼 생생함을 느꼈다. 실제로 어느 구역에서는 동전을 던지면 사라질 것만 같고, 어떤 특정 남자에게는 물음표가 보일 것만 같았다. 동전 마술에서는 스쳐 지나가는 인물에 대한 그리움과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에서는 현실을 반영한 풍자가 그려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A, B, C, D, E & F>는 게임이나 채팅 애플리케이션으로 연애 상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경험할 법한 일이다. 심지어 소설 화자처럼 주변의 친구로부터 이와 비슷한 내용을 들은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크게 공감이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뷰티 인사이드가 떠오르기도 했었다.
줄거리보다 생각과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온 작품도 있었다. 표제작인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이다. 다른 세상에서 생존해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사실 내용은 SF적인 요소들이 등장해서 이해하는 게 쉽지 않았다. 특히, 주인공이 브로콜리라는 이름의 생명체를 잡아서 먹는 모습이 있는데 알고 있는 채소인 브로콜리와 괴리감이 있었다. 남자의 고군분투도 와닿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과 대치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씁쓸함과 함께 깊이 생각에 빠졌다.
단편집에는 몇 장 분량의 짧은 이야기부터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야기까지 총 열세 편의 소설이 마치 무지개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배경도 고전을 느낄 수 있는 조선 시대부터 경험한 적이 없는 미래의 시간까지 광범위했으며,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이 등장하는 소설부터 현실을 풍자하는 소설까지 소재와 주제도 너무 다양해 소설 계의 31가지 아이스크림을 연상하게 했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있었던 소설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