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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윤슬 에디션) - 박완서 에세이 결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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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있다면 억지인 것처럼. / p.158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은 모의고사 시험지에서 많이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지적 허영심으로 소설을 등한시했던 터라 그렇게 많은 명작들을 읽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개인적인 해석보다는 일관된 답을 원하는 수능 체계에 대한 반항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이다. 자전거 도둑을 읽었던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기억이 흐릿해 남아 있지 않다. 시간이 된다면 작가님의 소설을 도장 깨기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는 미지수이다. 우선 도장 깨기의 처음으로 에세이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하게 되었다.
총 서른다섯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로부터의 가르침, 아들의 죽음,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남자에 대한 일화 등 일상에서 느꼈던 일들과 거기에서 들었던 생각과 감정, 박완서 작가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하나 필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공감이 되면서도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전부 기억에 남지만 두 가지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첫 번째 내용은 배달 기사와의 일화이다. 문예 심사를 위해 관련 서류를 받기로 했었는데 기사의 실수로 다른 아파트에 배달을 한 것이다. 기사는 잘못에 대해 인정했지만 퇴근했으니 가서 가지고 오시라는 말로 불쾌하게 반응했고 작가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늦은 시간에 온 기사는 생각보다 앳된 얼굴을 가진 남자여서 놀랐다. 너무하다는 말을 남기고 간 모습을 보면서 과연 당신께서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처음에는 그렇게 공감이 되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했다. 실수에 대해 다시 돌려놓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에 기사의 불쾌한 태도는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퇴근 여부와 상관없이 당연히 수거해서 드리는 게 맞다고 본다. 너무하다는 말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읽다 보니 작가님께서 느끼신 감정은 인간으로서의 연민이자 죄책감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도 상대방을 배려해 미안함을 가졌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내 잘못이라면 무조건 했겠지만 말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박완서 작가님의 등단하실 때 이야기이다. 에세이를 통해 마흔 살에 등단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작품이 나목이라는 이름의 소설인데 응모 마감까지 세 달 남은 상태에서 가족들이 자는 시간에 몰래 소설을 집필하셨다. 처음에는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놀라움을, 그 내용을 곱씹으면서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신 것만 같았다. 항상 무언가를 할 때 나이를 핑계로 주저할 때가 많은데 더 늦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해도 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박완서 작가님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과 사람에 대한 감정은 너무나 따뜻했다. 이렇게 인간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사람을 대한다면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보는 내내 내 마음도 제대로 된 온도를 찾아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요즈음 뉴스나 주변 이야기로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때가 있었는데 이 에세이를 통해 인류애를 다시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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