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생의 밤
이서현 지음 / 카멜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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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해도 추락을 하더라고요. / p.77

유행어 중에 '이생망'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번 생은 망했다 라는 문장의 줄임말. 처음에는 몰랐는데 주변 친구들이 자꾸 이생망이라고 해서 의미를 물어 알게 되었다. 나도 한때는 이생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을 하고 다니다 이대로 두면 말이 씨가 된다고 진심으로 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금은 아예 입밖에도 꺼내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이서현 작가님의 단편 소설집이다. 처음에 제목만 보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생망처럼 줄임말로 쓰는 용어인 줄 알았는데 검색을 해도 명확한 답변이 나오지 않아 더욱 관심이 생겼다. 나에게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다가왔는데 지금 내 또래 사람들의 현실에 공감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읽게 되었다.

사실 제목을 생각했던 것은 '망한 인생의 밤'의 줄임말이어서 망생의 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으면서 보니 '지망생의 밤'의 줄임말이었다. 처음에는 주인공들이 사회적으로 망한 인생인 것 같기는 한데, 우울하거나 절망적인 상황인 것 같기는 한데, 묘하게 그런 분위기는 없었던 게 아마도 지망생들의 이야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오히려 희망적이거나 위로를 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초단편 소설집으로 총 열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나이가 들어 프로게이머를 도전하는 사람부터 춤만 추던 사람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아 귤 따러 제주도로 간 사람, 웹툰 작가가 꿈이지만 이모티콘을 그리는 사람, 장기 공무원 준비생 등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망했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사람들이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인물들이어서 공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리얼리티 쇼>와 <이모티콘의 여왕>, <뽑기의 달인>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리얼리티 쇼>는 전 남자 친구를 프로그램에서 보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전 남자 친구는 작가로 책을 잘 팔았는지 TV 프로그램에 나온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주인공 여자는 그를 마치 죽여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시청한다. 책은 주인공 여자와 연관된 내용의 소설이었으며, 주인공은 라이브 문자를 보낸다.

실제로 전 남자 친구를 TV 프로그램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거기에서 나와의 과거사를 털고 있는 전 남자 친구를 보는 심정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불가능할 것 같다. 아마 말보다는 몸이 먼저 나가지 않을까. 이런 내용은 <망생의 밤>의 에피소드에서도 등장하는데 나의 상황이라고 감정이입을 해서 보았던 소설이었다. 읽으면서 내내 어이가 없었다.

<이모티콘의 여왕>은 웹툰 작가를 지망하지만 이모티콘으로 꽤 수익을 내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애인은 웹툰 작가를 권하면서 이모티콘을 만드는 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주인공은 나름의 항변을 하고 있지만 이런 말이 통할 일이 없다. 그렇게 주인공은 애인에게 조금은 평범하면서 특이한 방법으로 이별을 고한다.

요즈음 이별 방법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예전에는 진짜 카카오톡이나 DM으로 이별 날리는 인간들이 그렇게 책임감 없어 보였다. 연애의 시작은 몰라도 끝은 꼭 보면서 전해야 하는 게 흔히 말하는 국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만남보다는 전화가, 전화보다는 메시지가 익숙한 세대에서는 이것 또한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나가서 이별을 고하면 커피를 맞을 텐데 서로 깔끔하게 비대면 이별 방식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뽑기의 달인>은 장비 비용을 지원해 달라는 주인공은 서른다섯의 가구 디자이너 지망생이다. 5만원으로 교육을 받고 가구 디자인 장비를 구매하기 위해 백팔십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부모님께서는 거절한다. 교육한 것을 날릴 수는 없으니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다 이성 친구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는 빌려 달라는 말을 선뜻 말할 수 없다. 말을 빙빙 돌리다 500 원짜리를 탑처럼 쌓아 뽑기를 하고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도 뽑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

뽑기와 취업의 공통점을 말하는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처음부터 원하는 인형을 노리는 사람이 있고, 될 것 같은 인형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말. 개인적으로 뽑기의 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소질이 있는 편인데 보통 후자를 선택해 뽑는 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서 때 아닌 자아성찰과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왜 취업과 인생은 전자를 하려고 아등바등 대고 있을까. 될 것 같으면서도 잘하는 것을 고르면 되는데 왜 원하는 것만 노리고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조금 어지러웠던 소설이었다.

전반적으로 크게 공감이 되면서 희노애락을 경험했다. 나의 기대처럼 딱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의 사람이라면, 취업 준비를 했던 사람이라면, 지망생이라면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덮으면서 인간은 누구나 어떤 지망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많은 위로와 공감이 되었던 소설집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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