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 아킬레우스의 노예가 된 왕비
팻 바커 지음, 고유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그리고 날마다 밤낮으로 기도했다. 내 삶이 바뀌기를. / p.82

초등학교 때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이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꼭 한 권씩 가지고 다니면서, 또는 다른 친구들과 바꿔서 읽었다. 대략 스무 권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은 기가 막히게 배웠다. 아마 이 영향으로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신 중의 신은 제우스, 바다의 신의 포세이돈, 지하의 신은 하데스라는 사실은 아직도 기억할 것이다.

호흡이 긴 책을 읽을 지구력이 없는 나는 1권을 읽다 중도하차를 했다. 많은 신들의 이름을 구구절절 외우는 것도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왜 이십 년 넘게 흐른 지금까지 신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지 미스터리이다. 나에게 신화는 역사 시간에 배웠던 단군신화뿐인데 말이다.

이 책은 팻 바커의 신화에 대한 소설이다. 사실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서양에 나오는 신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 지식의 양으로만 따지면 아마 평균 이하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종이 한 장 두께의 소량 지식만 가지고 있는데 흔히 신화에서 다루는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관심이 있다. 사실 곡물의 여신인 데메테르, 가장 예쁜 아프로디테 등 여신들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신들의 여성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접한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브리세이스이다. 미네스의 아내이자 리르네소스의 왕비였으나 남편과 오빠들을 죽이고, 리르네소스를 함락시킨 아킬레우스의 상이자 노예가 된다. 딸을 달라고 요청하는 한 사제의 재물과 부탁을 거절한 아가멤논의 행동으로 브리세이스는 아가멤논의 노예로 끌려갔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이 대신 전쟁에 나가면서 다시 아킬레우스에게 돌아오기도 한다. 브리세이스의 시각으로 보는 트로이 전쟁 속 신들의 이야기와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는 여성 노예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으면서 크게 두 가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여성 노예에 관한 당시의 시각과 당사자인 여성 노예들의 생각이었다. 여성은 여기에서 물건처럼 취급이 되었다.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인간이 아닌 전쟁에서 이긴 대가로 받은 상이라고 표현했고, 아가멤논이 브리세이스를 선택한 이유도 아킬레우스의 자존심을 건들기 위함이었다. 브리세이스가 마음에 들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해도 어이가 없을 텐데 그저 상을 흠집 내기 위한 선택이라는 게 화가 나기도 했었다. 당시 시대상이기에 그것 또한 한계였을 것이고, 신화를 어떻게 건들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타협했다.

또한, 여기에서 브리세이스는 남편과 형제들을 죽인 남자와 동침을 한다는 것 자체에 큰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그러한 맥락으로 아킬레우스를 경멸했고, 자신도 증오했던 것처럼 보였다. 다른 신의 노예는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하는 생각의 꼬리까지 이어졌다. 물론, 같이 살면서 애정이 생겼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보는 입장에서는 와닿지는 않았다. 브리세이스도 이해를 하지 못했는데 갈수록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아킬레우스의 발언에 상처를 받는다든지 떠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내용들에서 아킬레우스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었다. 사실 아킬레우스 신화를 주제로 한 소설을 하나 들은 적 있었다. 동성애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아킬레우스는 알고 있었지만 상대는 몰랐다. 여기에서 파트로클로스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아킬레우스와 직접적으로 사랑의 감정이 묘사되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사랑이라고 느낄 법한 내용이어서 혼란스러웠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파트로클로스가 있는 이상 진전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면서 미쳐가더라도 그제서야 브리세이스와의 관계가 애정으로 진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겠지만 말이다. 우정 그 이상의 두 사람의 오묘한 감정도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나에게 신화를 주제로 한 소설들을 읽지 못한 이유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배경적 지식의 한계였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신들의 이름만 알고 있었기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걱정과 달리 술술 읽혔다. 대놓고 인물에 대해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흐름에 따라 읽다 보면 이해가 갈 정도로 친절한 소설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신화를 중심으로 한 다른 소설들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부족한 나의 지식적 한계를 느끼지 않아서 더 만족감이 높았다. 덕분에 그동안 몰랐던 신화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고 그동안 비추지 않았던 신화 속 여성 노예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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