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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대한 감각 ㅣ 트리플 12
민병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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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대한 먼 곳과 먼 시간을 떠올린다. / p.30
이 책은 트리플 시리즈로 민병훈 작가님의 단편 소설이 실렸다. 개인적으로 트리플 시리즈를 보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생겼다. 기회가 된다면 전부를 사서 소장하고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관심 가는 제목의 소설이 많았는데, 트리플 시리즈의 신작이어서 주저없이 읽게 되었다.
크게 세 개의 소설과 한 개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에 평론가님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실린 겨울에 대한 감각은 어머니와 함께 오키나와 여행을 갔던 일, 삿포로에 있었던 일, 공항 출국 심사와 같이 주인공이 겪었던 일들을 시간의 순서 없이 말한다. 이름 모르는 나라는 사람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을 기록한 이야기이다. 거기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기억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 또한 불현듯이 떠오른다.
두 번째 벌목에 대한 감각은 한밤중 집에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산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는데, 이는 환청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주인공 집 근처에서 벌목 작업이 시작이 되고, 주인공은 이러한 일이 달갑지 않다. 벌목에 대한 공포와 이웃들과의 이야기, 산림과 관련 공무원과 나누는 이야기, 벌목하는 인부들에게 향하는 복수심 등 주인공이 느낀 감정과 겪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세 번째 불안에 대한 감각은 주인공이 바다 위 배위에서부터 시작된다. 과거에 보았던 어떤 사건이 떠오르고, 그걸로 어렸을 적 친구와 비오는 날 있던 개구리의 죽음을 떠올리기도 한다. 첫 번째 소설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무의식적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어떻게 보면 충격적인 상황을 보았던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에세이는 저자에 대한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단순한 정보부터 평소에 생각하는 것, 어떠한 상황에 가지고 있는 감정,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따로 부가적인 설명 하나 없이 쭉 나열했다. 질문 하나 없는 백문백답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세 개의 소설은 하나같이 죽음이라는 것과 관통이 되어 있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죽음, 두 번째는 동료의 죽음, 세 번째는 바다에서의 죽음. 죽음이라는 어떠한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감정들이자 생각이었다. 그것을 대변하는 겨울과 벌목, 불안에 대한 감각이 곧 제목이었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어떻게 보면 큰 사건에서 보았던 감정들이 친절하게 서술이 되어 있다거나, 보편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그저 읽으면서 나만의 방식과 기억에 의존해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 그리움 등의 감정을 추측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난감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소설이자 에세이였다.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과 에세이는 어느 정도 스토리 라인이 있었는데, 여기에 실린 소설들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어진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바뀌는 상황과 배경, 주인공의 흐름에 당황스럽기도 했었다. 심지어 이전 페이지에서는 독자에게 감정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전달이 되던 것이 갑자기 다음 장에서는 옆에 있는 다른 화자와의 대화로 감정을 전달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학교에서 배웠던 이상 작가의 시와 소설이 겹쳐서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암호처럼 느끼기도 했었다. 이것은 대체 무슨 말이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이야기인가.
읽으면서도 혼란스러운 기억을 안고 해설을 보니 내가 생각했던 부분들이 맞아 떨어졌다. 해설에 따르면 보통 소설이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인물이 하는 일련의 행동과 생각이 맥락에 따라 읽혀지는데, 저자의 소설들은 이러한 습관이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의 감정과 생각, 배경 이외의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어서 정리가 되지 않았는데, 해설로서 나름의 위안을 얻기도 했다.
소설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사진에 가깝다. 이해하는 자체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풍경과 벌어지는 일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는 게 수월했다. 주인공이 출국심사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장면, 나하 공항과 스스키노의 풍경 등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다양한 이야기 자체는 사진으로 그려졌다. 아마 우리가 읽는 보통의 소설들이 필름이라고 하면 이 소설은 사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추억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을 머릿속으로 촬영한 하나의 사진을 조각조각 글로 서술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늘 시간에 흐름에 따라 정리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행에서 좋은 풍경을 보고 있을 때, 침대에 누워 자기 전에 불쑥 사랑하는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일 할 업무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하는 것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기억할 때가 많다. 이러한 부분에서 저자의 이야기들이 뭔가 끌리는 매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난해하게 시작했지만 오래 씹고 생각해야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을 만나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