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계로 시선을 돌려 그 한가운데에 있는 푸른 지상을 보았다. 지구의 표면은 4차원의 눈으로 보면 좀 보푸라기 같은 살아 있는 색실이 뒤엉겼다 풀렸다가 합쳐졌다 한다. 보려 하면 변하고 집으려 하면 그곳에 없다. 그들 또한 모두 명계와 끈으로 이어져 있고 자신들끼리도 마찬가지로 서로 이어져 있다. 그중 밀도가 높고 진동이 큰 개체 하나하나를 굳이 ‘인격‘이라 한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다.
나는 나반의 인격을 돌이켜보며 비웃었다. 그가 얼마나 하계에 집착했던가. 얼마나 집착했는지 하계에서 고행과 수행을 하는 것으로 그 세계가 허상이라 믿고자 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계에 대한 집착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달리 아만과 탄재가 그에게서 나왔겠는가. - P147

아만은 그 모든 죽음을 슬퍼했다. 그들 모두가 별개의 생명이며 각자의 인격이며, 내가 감히 그 생을 좌지우지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죽음은 허상이다. 슬퍼하지 마라."
"그래도 나는 슬퍼할 수밖에 없어."
문득 상대방이 인간처럼 느껴졌다. 애처로운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나반의 죽음을."

나반의 죽음.
이상한 말이로군.
죽음은 없다. 물론 아만과 나반의 인격은 이제 다시 표면에서 활동하는 일은 없겠지만………… 그것이 죽음은 아니다.
둘의 기억은 내 안에 남아 있을 것이고 세계가 그리하듯 영원할 것이니, 나반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죽는다한들 슬퍼할 건 또 뭐란 말인가. - P152

그리고 나반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반은, 아니, 나는 무엇에 홀린 기분으로 주위를 허황하게 돌아보았다. 조금 전에 내가・・・・・・ 아니, 그건 내가 아니었다. 도저히 나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속한 전체로서의 ‘그‘가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내가 아닌‘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끝장내려 하다니. 이 무슨 무시무시한 악마적인 망상이란 말인가. ‘내 것도 아닌 생명‘을 감히 없애려 들다니. 그들 중 죽음을 바란 이는 아무도 없건만, 내가 무슨 권리로 무슨 자격으로.
슬픔이 몰아쳤다. 울고 싶었고, 나는 울었다.
"00."
누군가가 낯선 이름으로 나를 불렀다. 인파를 제치고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상대를 껴안았다. 그는 나를 끌어안고 내 입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만.‘ - P155

"그 말이 맞아."
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말하는 사이에 피부가 얇게 내몸을 덮고, 모공이 생기고 땀구멍이 나타났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이마에서는 땀까지 흘렀다.
"세계는 불균형해졌다. 내가 너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에."
그래, 잘못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인이 없는 세계에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타인이 없는 세계에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선행도 희생도 덕목도 연심도 없다. 하지만 단 하나, 그것만은 잘못이었다.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세계는 타락했다.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했을 때." - P159

"나로부터 분리가 시작되었다. 너와 내가 나뉘었기에 네가 분리를 추구하는 속성을 맡은 것 뿐이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균형을 위해 합일을 추구하는 속성을 맡게 되었을 뿐인 것을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였을 뿐이다. 세계의 타락은 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타락은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하고 우리 전체로부터 배제하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내가 세상을 타락시켰고 나 또한 그로 인해 타락했다." - P168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는 자에게 어찌 연민이 있을까. 타인을 상상하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하고,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분리 없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영원과 불멸의 진실을 아는 자가 어떻게 삶을 소중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전체로서의 나는 전능했고 동시에 아무 가치가 없었다. 나는 완전무결했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타인이 없었던 시절의 우리에게 삶은 없었다. 명제는 허상이었다. 하계의 삶만이 진실이었다.
- 잘못은 없어. 나반
아만이 속삭였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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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살아 있어이 우주도 살아 있는 것이라고. 저 하늘 어딘가에 전지전능하지만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존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삶의 투쟁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 한 사람의 인격의 신성함을 모르는 자들이 단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계약이 있어, 내 생이 유지되는한 저들이 이 세계를 어쩌지 못하는 거라고………….
・・・・・・ 아니면 말고.
그래도 어디 사는 데까지 살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나는 바구니를 고쳐 들고 아만이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 P247

"아만의 아이들은 하계에 명계의 지식을 전파했다. 신들의 기술과 지혜를 전수했다. 하계의 기술과 지식은 눈부시게 성장했고 이제 도술과 마술의 영역을 넘본다. 단계를 넘어선 하계인들은 명계와도 소통하게 되었고 이제 사후세계의 존재를 안다. 하계인들은 이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안다. 모든 선지자의 지혜가 영적 채널을 통해 그들에게 전달된다. 모두 아만이 원한 대로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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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운 역사에서 이 아이는 홀로 전쟁터를 빠져나가 산중에 자리한 도적떼 막사에 들어간다. 전쟁과 나라를 피해 도망친 농민들이 모여 만든 곳이었고 순박하고 낭만적인 질서가 있었다. 아만은 거기서 도술과 학문을 익혔고 나이가 든 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그녀는 민란을 일으켜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패왕으로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수를 누리고 죽은 뒤, 아시아 전역에서 유럽까지 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해 여왕 중심의 군주정과 남녀동수의 정치구조가 퍼졌다. 역사 전반에 여성왕조가 생겨나며, 현대의 민주정과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법 발전된 형태의 시민정이 일찍부터 세계 전체에 자리 잡게 된다. 내가 이 아만을 삭제했을 때 그 역사는 사라졌고 그녀의 삶은 민담과 전설에 희미한 흔적만 남겼다.
나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다른 아만도 모두 삭제해 회수했고 그들의 삶은 신화의 영역으로 사라졌다. 아만이 분열을 많이 한 후기 역사에서는 더 거칠게 일을 꾸몄다. 중세 어느 때에는 되지도 않는 마녀사냥을 벌였고 근현대에는 태아 감별을 써먹었다. 내가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고대 민주정은 그리스 도시국가에 협소하게만 남았고 대부분의 왕조에서 민란과 시민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며 여성은 모든 사회정치구조에서 배제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 P232

"알 것 같네요. 역사는 가변적이죠. 단지 변할 때마다 세계 전체의 기억이 같이 변해버려서 변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시간 역행을 한 본인 외에는 말이죠. 꼭 어드벤처 게임에서 게임 속 캐릭터는 하나의 경로만 기억하지만, 플레이어는 멀티 분기를 다 기억하는 ………." - P233

"그래도 이게 원래 세상이었던 거죠?"
"원래 세상이라는 것은 없어."
내가 답했다.
단 하나의 삶과 그 삶으로 매양 모습을 바꾸는 우주가있을 뿐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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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의 결말은 죽음이야. 기분이 좋을 리가 있나." - P13

"알아."
안다. 내가 아는 것은 이자도 알고, 이자가 아는 것은 나도 안다.
‘이자는 나다.‘
나는 생각하며 흙을 손으로 쥐었다. 이끼와 작은 씨앗, 마른 이파리가 섞인 흙이 손가락 사이로 부스스 빠져나간다. 모래, 두 개의 산소 팔을 가진 규소, 열네 개의 전자가 회전하는 원자, 근원으로 내려가면 모두 같은 물질. 모두 나와 같은 물질.
‘이곳은 나다.‘
내 중음(中陰)이다.
어떤 생에서는 죽음을 넘나들다가 여기까지는 왔다가기도 했다. 돌아가서는 사후 세계를 보고 왔노라 흥분해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보고 간 것은 언제나 내 중음뿐이었다. - P15

"가난, 불행, 결핍, 학대, 사랑받지 못한 삶, 모두가 사람을 타인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영적으로 타락시켜요. 세상이 자신과 같은 것인 줄 모르게 만듭니다."
"……"
"제 몸 하나만 건사하는 데에 정신을 다 잃게 만든다고요."

-하계 사람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어요.
아만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에요. 별개의 존재예요. 우리 마음대로 운명을 짜고 삶을 조정할 권리가 없어요.


나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 아이와 내가 똑같은 것이라고? 차이가 없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는 하계가 허상임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것이 오히려 하계의 삶에 집착을 가져왔다고? 우리의 분리를 가속화시켰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나와 연결된 내 모체와 소통할 수가 없고, 남의 마음은커녕 내 마음도 다 들여다볼 재간이 없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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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나다.

모두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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