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운 역사에서 이 아이는 홀로 전쟁터를 빠져나가 산중에 자리한 도적떼 막사에 들어간다. 전쟁과 나라를 피해 도망친 농민들이 모여 만든 곳이었고 순박하고 낭만적인 질서가 있었다. 아만은 거기서 도술과 학문을 익혔고 나이가 든 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그녀는 민란을 일으켜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패왕으로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수를 누리고 죽은 뒤, 아시아 전역에서 유럽까지 오리엔탈리즘을 포함해 여왕 중심의 군주정과 남녀동수의 정치구조가 퍼졌다. 역사 전반에 여성왕조가 생겨나며, 현대의 민주정과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제법 발전된 형태의 시민정이 일찍부터 세계 전체에 자리 잡게 된다. 내가 이 아만을 삭제했을 때 그 역사는 사라졌고 그녀의 삶은 민담과 전설에 희미한 흔적만 남겼다.
나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다른 아만도 모두 삭제해 회수했고 그들의 삶은 신화의 영역으로 사라졌다. 아만이 분열을 많이 한 후기 역사에서는 더 거칠게 일을 꾸몄다. 중세 어느 때에는 되지도 않는 마녀사냥을 벌였고 근현대에는 태아 감별을 써먹었다. 내가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고대 민주정은 그리스 도시국가에 협소하게만 남았고 대부분의 왕조에서 민란과 시민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며 여성은 모든 사회정치구조에서 배제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 결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 P232

"알 것 같네요. 역사는 가변적이죠. 단지 변할 때마다 세계 전체의 기억이 같이 변해버려서 변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시간 역행을 한 본인 외에는 말이죠. 꼭 어드벤처 게임에서 게임 속 캐릭터는 하나의 경로만 기억하지만, 플레이어는 멀티 분기를 다 기억하는 ………." - P233

"그래도 이게 원래 세상이었던 거죠?"
"원래 세상이라는 것은 없어."
내가 답했다.
단 하나의 삶과 그 삶으로 매양 모습을 바꾸는 우주가있을 뿐이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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