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세탁소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지나온 계절을 보관 하는 박물관 같은 공간이다.

그러니까 세탁소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지나온 계절을 보관 하는 박물관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세탁소는 오늘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잠자리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화려한 원피스를 수선할 때나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니트 블라우스를 다릴 때가 되면 정말 귀신같이 가게 앞 아스팔트의 아지랑이가 피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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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학자들은 애도가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 순으로 이어지는 선형적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연구에서 애도 반응은 순차적이거나 직선적이지 않으며 사람마다 다른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밝혀냈다.
상실을 경험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일련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뒤 결국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상실한 대상과 관계를 재정립하며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합된 애도(integrated grief) 단계로나아간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일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지속적인 애도 반응을 보인다. 이를 연구자들은 ‘복합성 애도(complicated grief)’ 또는 ‘지속적 애도 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라 부른다. ‘복합성‘은 상처가 났을 때 발생하는 ‘합병증(complication)‘에서 온 단어다. 즉사별을 경험한 후 상실에 적응하는 것을 가로막는 생각, 감정, 행동들이 마치 상처 치유과정을 방해하는 합병증과 같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 P39

애도를 정신 질환으로 봐야 하는지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미국정신의학회는 수많은 연구 결과를 검토해, 2022년 발간된 《정신 질환진단 및 통계 메뉴얼 개정판(DSM-5-TR)》에 처음으로‘지속적 애도 장애’를 공식 진단명으로 포함시켰다. 개인적으로 지속적 애도 장애보다는 복합성 애도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에 ‘장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불편해서다. 하지만 공식 용어로 정해진 만큼 이어질 글에서 ‘지속적 애도 장애‘ 라는 표현을 쓰겠다.
지속적 애도 장애를 겪는 사람의 시계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순간에 멈춰 있다. 늘 망자 생각에 사로잡혀있고 그가 없는 삶은 더이상 가치가 없다고 느낀다. 또한 이들은 오랜 기간(12개월 이상) 강렬한 슬픔과 애도반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P40

사랑하는 딸을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떠나보낸 한 중년 여성 환자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딸의 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딸의 죽음이 어제 일어난 일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런 그녀의 하루 일과는 딸의 방에 들러서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딸아이 방으로 가요. 그리고 아이의 이름을 불러요. 잘 지내니? 엄마는 잘 지내."
그녀는 딸의 임종을 매일 떠올렸다.
연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 중 약 7~10퍼센트 정도가 지속적 애도 장애를 경험한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이나 타살로 목숨을 잃었을 때 경험할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 이들 중 일부는 정신과나 심리상담센터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치료가 필요한 증상으로 여기지않고 방치한다. - P41

그렇다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까. 증상의 심각성에 따라 면밀히 판단해야겠지만 공통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거나(앞선 환자같이 "아직도 그 사람이 떠난 게 어제 같아요"라고 말하는경우가 흔한 예다), 사회적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 또는 손상되거나(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다든가, 집 밖으로거의 나가지 않고 고립되어 있는 경우), 절망감 또는 자살생각이 든다면 전문적인 치료를 고려해보기를 권한다. - P42

흔히 애도를 여행에 비유한다. 훌쩍 떠났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고 생각이 정리된 후 제자리로 돌아와서 일상을 영위하는 여행. 하지만 나는 애도란 ‘완전히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도 그를 잃은 나를, 잃기 전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지는 못한다. - P44

애도는 그렇게 새로운 나를 만나고 고인과 이전과 다른 방식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정이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더라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며 세상은 충분히 가치 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애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고인을 떠나보내는 순간 ‘애도‘로 탈바꿈한다. 즉 애도는 상실 후 경험하는 사랑의 다른 모습인 것이다."
치료가 끝나가던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물어보았더니, 이제 액자를 현관 근처 벽에 걸어 놓았단다.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아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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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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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람 도서관 서고 한 켠의 이야기다. 내가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만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은 나에게 새로운 ‘책‘과 같았다. 그 책 속의 이야기들은 때로는 감동적이고 자주 슬펐으며 눈물 나도록 아름다웠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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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넌 요새 너무 몰입했어. 삶은 고해(苦海)며 허상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돌아온 뒤가 진짜다."
"살고자 하지 않으면 삶에 의미는 없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 삶은 진짜여야 하지. 내려가서는 그렇게 믿어야겠지. 그러지 않으면 분탕질이나 하고 허송세월이나 하다가 올 뿐이지. 하지만 돌아와서까지 그럴건 없잖니. 간만에 다같이 모였는데 재미있게 놀자꾸나." - P71

"나반."
그때 아만은 내가 다시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하계는 진짜예요."
아만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그 안에 시신경과 혈관과 거기에 이어진 진짜 뇌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로 젖어 있었다. 동공은 깊었고 슬픔으로 흔들렸다.
"하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요." - P72

사소한 마음의 결핍이 있는 인간 여자였던 나를 찾아내었다.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 정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일생 아이 없이 살았지만 이제 그의 생에 아이가 찾아올 것이다. 둘은 투쟁하듯이 사랑할 것이다. 싸우고 상처받을 것이다. 실수도 잦겠지만 서로에게 배울 것이다. 상처받겠지만 상처받은 만큼 치열하게 살 것이다. 서로의 삶이 둘의 생에서 화두가 될 것이다.
"내가 네 어머니가 되어주겠다."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그 생에서 배울 것은 ‘공감‘이다. 그 생에서 무엇이 되었든 너 자신과 같다고 믿을 것을 찾아라. 사람이어도 짐숭이어도 사물이어도 상관없다. 그러면 타락이 너를 떠날 것이다. 그러면 네 의지로 분열하거나 합일할 수 있을 것이다." - P83

우리에게 벌은 없다. 무슨 고통이 있어 벌을 주겠는가, 우리에게는 상도 없다. 무슨 쾌락이 있어 상을 주겠는가. 가르침이 있고 배움이 있을 뿐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줄 때가 있을 뿐이다.
"어머니, 당신은 타락했습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때까지 격리하겠습니다. 내 몸으로 벽을 만들어두겠습니다. 몸의 일부를 당신 곁에 두겠습니다. 그 벽이 당신 자신이며, 자신과 같은 것이며, 또한 나와 같은 것이며,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 P92

"세계는 불균형해졌다. 내가 너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에."
그래, 잘못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인이 없는 세계에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타인이 없는 세계에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선행도 희생도 덕목도 연심도없다. 하지만 단 하나, 그것만은 잘못이었다.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세계는 타락했다.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했을 때.‘ - P159

"나로부터 분리가 시작되었다. 너와 내가 나뉘었기에 네가 분리를 추구하는 속성을 맡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균형을 위해 합일을 추구하는 속성을 맡게 되었을 뿐인 것을.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였을 뿐이다. 세계의 타락은 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타락은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하고 우리 전체로부터 배제하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내가 세상을 타락시켰고 나 또한 그로 인해 타락했다." - P160

"가엾은 나반"
도솔천의 목소리가 핑핑 도는 머릿속을 무정하게 울렸다.
"도솔천…………, 너는 타락했다."
나는 진흙 바닥을 쥐어뜯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솔천의 황금빛 눈이 실룩거렸다.
"우리가 생겨난 이래 너처럼 타락한 개체가 있었을까. 하계라는 저 거대한 전체마저 부정하다니. 아만도 나도 모두 너다, 도솔천. 저 하계는 전부 너다. 네가 타락했다 말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너다."
나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네가 네 일부를 부정했으니 너는 타락했다. 지금 네가 타락하여 제 타락을 깨닫지 못한다."
도솔천은 그 문제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자는 마음에 경계가 생기고 경계 바깥을 인식하지 못한다. 제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라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 P174

"그럼 왜 가려고 해요?"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살고 싶다."
내가 말했다. 탄재는 못 알아듣는 얼굴을 했다.
"한 생일 뿐이라도 좋아. 살고 싶다. 어차피 생은 하나뿐이고 그걸로 족하다. 네가 이 목숨을 주었으니 이 생 하나는 살아야 하겠다." - P193

하계에 가면 아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쏟아졌으니 만나는 모든 것이 아만일 것이다. 어디를 보나 아만일 것이다. 무엇을 사랑하든 그이일것이다. 누구와 연을 맺든 그이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기분이 좋았다.
그중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아만을 생각했다.
이불에 누워 나를 바라보던 아만을 생각했다. 창에서 쏟아지던 햇빛을 생각했다. 아침마다 같이 맡던 차 향을 생각했다. 생이 이대로 끝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이 이것 하나뿐이어도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이가 내 청혼을 받아들였던 날이 떠올랐다. 비가 몹시 오던 날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어느 건물 차양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가 나도 모르게 청혼을 했다. 무슨 청혼이 이 모양이냐고 한참을 그 아래에서 싸웠다. 서로 밀치는 바람에 빗속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먼저 간다고 화를 내고 걷다가 추워서 도로 차양으로 돌아와 오들오들 떨며 비를 피하기도 했다. - P195

나는 내 모든 가능성을 안다. 또한 내 모든 모순을 안다.
내가 나반이요 태초의 기억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엇 하나 내가 아닌 것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전체의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 없으며 단지 더 큰 자와 더 작은 자가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타락이 세상에서 무엇을 배제하려할 때 찾아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도울 것이 있겠는가, 도솔천."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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