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넌 요새 너무 몰입했어. 삶은 고해(苦海)며 허상이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돌아온 뒤가 진짜다." "살고자 하지 않으면 삶에 의미는 없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 삶은 진짜여야 하지. 내려가서는 그렇게 믿어야겠지. 그러지 않으면 분탕질이나 하고 허송세월이나 하다가 올 뿐이지. 하지만 돌아와서까지 그럴건 없잖니. 간만에 다같이 모였는데 재미있게 놀자꾸나." - P71
"나반." 그때 아만은 내가 다시는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하계는 진짜예요." 아만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그 안에 시신경과 혈관과 거기에 이어진 진짜 뇌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물로 젖어 있었다. 동공은 깊었고 슬픔으로 흔들렸다. "하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에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요." - P72
사소한 마음의 결핍이 있는 인간 여자였던 나를 찾아내었다. 정을 받지 못하고 자라 정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일생 아이 없이 살았지만 이제 그의 생에 아이가 찾아올 것이다. 둘은 투쟁하듯이 사랑할 것이다. 싸우고 상처받을 것이다. 실수도 잦겠지만 서로에게 배울 것이다. 상처받겠지만 상처받은 만큼 치열하게 살 것이다. 서로의 삶이 둘의 생에서 화두가 될 것이다. "내가 네 어머니가 되어주겠다."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네가 그 생에서 배울 것은 ‘공감‘이다. 그 생에서 무엇이 되었든 너 자신과 같다고 믿을 것을 찾아라. 사람이어도 짐숭이어도 사물이어도 상관없다. 그러면 타락이 너를 떠날 것이다. 그러면 네 의지로 분열하거나 합일할 수 있을 것이다." - P83
우리에게 벌은 없다. 무슨 고통이 있어 벌을 주겠는가, 우리에게는 상도 없다. 무슨 쾌락이 있어 상을 주겠는가. 가르침이 있고 배움이 있을 뿐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가르침을 줄 때가 있을 뿐이다. "어머니, 당신은 타락했습니다.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을 때까지 격리하겠습니다. 내 몸으로 벽을 만들어두겠습니다. 몸의 일부를 당신 곁에 두겠습니다. 그 벽이 당신 자신이며, 자신과 같은 것이며, 또한 나와 같은 것이며,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 P92
"세계는 불균형해졌다. 내가 너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에." 그래, 잘못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도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인이 없는 세계에 어떻게 죄가 있겠는가. 타인이 없는 세계에는 잘못은커녕 그 무엇도 없다. 가치 있는 일도 없다. 선행도 희생도 덕목도 연심도없다. 하지만 단 하나, 그것만은 잘못이었다. 그것만은 감히 ‘죄‘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은 것이었다. "세계는 타락했다.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했을 때.‘ - P159
"나로부터 분리가 시작되었다. 너와 내가 나뉘었기에 네가 분리를 추구하는 속성을 맡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남은 이들이 균형을 위해 합일을 추구하는 속성을 맡게 되었을 뿐인 것을. 서로가 서로의 빈자리였을 뿐이다. 세계의 타락은 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타락은 내가 너를 타락했다고 규정하고 우리 전체로부터 배제하려 했을 때 시작되었다. 내가 세상을 타락시켰고 나 또한 그로 인해 타락했다." - P160
"가엾은 나반" 도솔천의 목소리가 핑핑 도는 머릿속을 무정하게 울렸다. "도솔천…………, 너는 타락했다." 나는 진흙 바닥을 쥐어뜯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솔천의 황금빛 눈이 실룩거렸다. "우리가 생겨난 이래 너처럼 타락한 개체가 있었을까. 하계라는 저 거대한 전체마저 부정하다니. 아만도 나도 모두 너다, 도솔천. 저 하계는 전부 너다. 네가 타락했다 말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너다." 나는 목소리를 쥐어짰다. "네가 네 일부를 부정했으니 너는 타락했다. 지금 네가 타락하여 제 타락을 깨닫지 못한다." 도솔천은 그 문제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자는 마음에 경계가 생기고 경계 바깥을 인식하지 못한다. 제가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라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 P174
"그럼 왜 가려고 해요?"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존재, 모든 지식을 합일한 자가 이처럼 작은 존재의 머릿속 하나 들여다보지 못하다니. 아마 상대도 비슷한 경이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은 존재가 이처럼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다니. "살고 싶다." 내가 말했다. 탄재는 못 알아듣는 얼굴을 했다. "한 생일 뿐이라도 좋아. 살고 싶다. 어차피 생은 하나뿐이고 그걸로 족하다. 네가 이 목숨을 주었으니 이 생 하나는 살아야 하겠다." - P193
하계에 가면 아만이 있을 것이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쏟아졌으니 만나는 모든 것이 아만일 것이다. 어디를 보나 아만일 것이다. 무엇을 사랑하든 그이일것이다. 누구와 연을 맺든 그이일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기분이 좋았다. 그중 가장 열렬히 사랑했던 아만을 생각했다. 이불에 누워 나를 바라보던 아만을 생각했다. 창에서 쏟아지던 햇빛을 생각했다. 아침마다 같이 맡던 차 향을 생각했다. 생이 이대로 끝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생이 이것 하나뿐이어도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이가 내 청혼을 받아들였던 날이 떠올랐다. 비가 몹시 오던 날이었다. 오도 가도 못하고 어느 건물 차양 아래에서 비를 피하다가 나도 모르게 청혼을 했다. 무슨 청혼이 이 모양이냐고 한참을 그 아래에서 싸웠다. 서로 밀치는 바람에 빗속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먼저 간다고 화를 내고 걷다가 추워서 도로 차양으로 돌아와 오들오들 떨며 비를 피하기도 했다. - P195
나는 내 모든 가능성을 안다. 또한 내 모든 모순을 안다. 내가 나반이요 태초의 기억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엇 하나 내가 아닌 것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내 전체의 가치의 경중을 따질 수 없으며 단지 더 큰 자와 더 작은 자가 있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타락이 세상에서 무엇을 배제하려할 때 찾아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도울 것이 있겠는가, 도솔천."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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