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님이 지금 입고 있는 폴로셔츠는 톰브라운 제품인데 70만원대예요. 물론 형사님은 몰랐겠지만. 이걸 선물해 준 사람은 형사님이 한동안 자주 입던 그 핑크색 옥스퍼드 셔츠를 선물해 준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겠네요. 뭔지 알죠? 저랑 맨처음에 접촉 사고 났을 때 입고 있던 옷. 선물해준 분 취향이 굉장히 일관되네. 아, 그리고 혹시 몰라 얘기하는데 그 셔츠도 가격대가 비슷해요. 바지는 형사님이 직접 샀어요. 항상 캘빈 제품만 고집하길래 처음엔 취향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한번 갔던 매장만 맨날 가서 그런 거예요. 운동화는 서너 켤레를 번갈아 신는데 지금 신고 있는 건 나이키 북미 한정판 두 시즌 전 제품. 이것도 선물받은 거. 근데 셔츠랑은 다른 사람. 뭐, 이래도 커피홀릭이 입고 있던 옷이 짝퉁이 아닐까요?" - P81
커피홀릭은 대체 왜 짝퉁을 입었을까? 아니, 왜 유튜브 영상을 찍을 때마다 꼭 명품 브랜드 짝퉁만 입고 나왔을까?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해서 얻는게 뭔데? 솔직히 말하면 커피홀릭이 실종된 날 입고 있던 원피스를 보자마자 한눈에 짝퉁임을 알아차렸던 건 아니다. 형사 양반 앞에선 있어 보이는 척하느라고 단번에 알아챈 척 했지만. 커피홀릭은 실종 전에도 그 원피스를 입은 적이 있다. 리나와 함께 한남동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을 갔을 때였는데, 그날도 커피홀릭은 스카프를 한 채로 식사를 했다. 코스가 진행될 때마다 행여 뭐라도 흘릴까 싶어 아주 티나게 조심하면서. 호박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흰 바탕에 핑크와 코럴 컬러 꽃무늬가 빼곡한 원피스. 그 원피스와 같은 원단으로 만든 스카프. 그리고 스카프 끝에 묻은 붉은 자국, 대체 어디서 묻은 걸까? 그런 얼룩이 생겼으면 벗을 법도 한데. - P84
벗지 않은 게 아니라 벗지 못한 거다. 탈착이 안 되니까. 진품은 스카프가 탈착식이지만 커피홀릭이 입은 옷은 짝퉁이라 스카프가 분리되지 않으니까. 커피홀릭이 올린 모든 영상에서 입고 나온 옷이 다 그랬다. 모조리 다 짝퉁이었다. 심지어 명품 하울이라며 언박싱을 하는 영상들까지도. 아주아주 정교한 짝퉁. 대체 왜? 굳이 그렇게 집착적으로 짝퉁을 챙겨 입으면서ㅍ명품을 입는 척하는 이유가 뭔데? 웃기는 건 커피홀릭이 올린 영상 속에서 리나가 입고 두른 건 죄다 진짜 명품이었다는 점이다. 늘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커피홀릭이 가진 가짜들을 리나가 정말 몰랐을까? 가짜가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진짜를 가진 사람은 가짜를 알아볼 수 밖에 없기 마련이다. 두 사람은 꽤 자주 붙어 다녔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늘 영상을 찍는 쪽은 커피홀릭이었고 그 영상을 올리는 쪽도 커피홀릭이었다. 마치 리나와 함께 다니는 것을 과시라도 하듯이. - P85
다림질 작업대에 셔츠를 펼쳐 올리고 세탁 커버를 벗겼다. "근데 바지사장이에요. 투자자, 그러니까 진짜 주인은 따로있다고 했어요. 이건 그 투자자한테 받은 선물이고요." 말하는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셔츠 목깃에 붙은 라벨을만지작거렸더니 그의 시선이 내 손끝으로 따라붙었다. "설마 그것도 짝퉁입니까?" "네. 펜디인데 올봄신상이라고 했대요. 근데 이번 S/S 펜디 남성 셔츠 중에 이런 코튼 셔츠는 전부 칼라 안쪽이나 바깥쪽에 실크 로고 트리밍이 있거든요." 아…………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모양이다. 하긴, 지금자기가 신고 있는 신발이 한정판인 줄도 몰랐던 양반인데 뭘기대해. "여기, 이 옷소매에 있는 것처럼요. 다른 소재나 무늬로 라이닝을 해서 포인트를 준다구요." "아......." 그가 정말 별걸 다 본다는 눈길로 셔츠 옆에 나란히 올려둔 재킷 소매를 매만졌다. - P98
"자. 이 두 영상의 다른 점을 찾아보세요." 태블릿과 핸드폰에서 영상 두 개가 동시에 재생되었다. 둘다 커피홀릭이 우리 가게 앞을 지나가던 CCTV 영상이었다. "영상이………… 두 갭니까? 지난번엔 하나만 줬잖아요." "뭐, 그렇게 됐네요." "파트너 하기로 해 놓고 이러기 있습니까?" "내가 언제 형사님이랑 파트너 한댔어요? 커피홀릭 어디 있는지 찾겠다고 했지." "그게 그 말…… 하……………" 형사 양반이 눈가를 꾹 눌렀다. "자, 빨리 찾아봐요." 환장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영상을 훑기 시작했다. "이쪽은 방송 시작 전, 이쪽은 방송 시작 후 같은데요." "라이브는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촬영 전과 후예요. 둘다 카메라를 들고 있긴 한데 왜 굳이 같은 장면을 두 번이나 찍었을까요??" 형사 양반이 잘 모르겠다는 듯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여기요." 영상 두 개가 같은 장면에서 멈췄다. 가게 앞 CCTV에 가장 근접한 순간이 찍힌 장면이었다. 정지한 화면 속 커피홀릭의 상반신을 확대했다. - P100
"깨끗하죠?" 가게를 물려받고 CCTV를 새로 설치하면서 큰돈을 들인게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제법 선명한 컬러 영상 속에서 커피홀릭이 입은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는 누가 봐도 깨끗했다. "지난번에 말했죠? 이 원피스 이번 시즌 신상이라고. 옷의무늬가 전체적으로 화려해서 처음엔 저도 알아채질 못했는데여기 스카프 때문에 안 거예요. 스카프 끝에 빨갛게 얼룩덜룩한 자국 보이죠? 김치 국물이에요." "김치 국물이요?" 형사 양반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치, 황당하지. 이걸 발견한 나도 그랬는데 이 양반은 오죽할까. "처음에는 깨끗한 옷을 입고 가게 앞을 지나갔는데 다시왔을 때는 스카프 끝에 김치 국물이 튄 채로 촬영을 했어요. 이 원피스에 달린 스카프는 진짜 명품이라면 탈착식이구요. 그러니까 스카프를 안 할 수도 있었다는 거죠. 근데 굳이 이렇게 김치 국물이 묻은 스카프를 계속 하고 있다? 뗄 수 없으니까 그런 거예요. 짝퉁이니까. 탈착이 안 되는 옷이었던 거죠. 혹시나 해서 이 사람 다른 영상도 몇 개 확인해 봤는데 입고나온 옷 대부분이 짝퉁이었어요. 누가 봐도 ‘아, 저건 어느 브랜드의 뭐다‘ 싶은 건 전부 다요. 그리고 이전에도 이 옷을 입고 촬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스카프에 뭐가 묻진 않을까 엄청 신경 쓰고 조심하더라구요. 형사님도 보시다시피 이 스카프가 좀..… 지나치게 크고 거추장스럽잖아요." 내 말에 그의 시선이 스카프에 꽂혔다. 목 주변에 커다랗게 꽃 모양이 잡혀 있고 그 밑으로 남은 천이 가슴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스카프. - P101
"그쪽이 입고, 신고, 들고 나온 거 전부 다 짝퉁이더라구요? 진품은 하나도 없던데. 아, 딱 하나 진짜가 있긴 했네. 그쪽이 아주 소중하게 다루던 루이 비통 스피디 35. 근데 그렇게 매번 무릎에 올려 두기에 35는 사이즈가 좀 크지 않나?" 커피홀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킨 사람처럼. "세상에, 천만 원이 넘는 버킨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턱턱 내려놓고 굴리면서 10분의 1 가격밖에 안 되는 스피디를 그렇게 소중히 감싸 안고 있으면 그게 티가 안 나겠어요? 아, 그리고 지금 입은 그 원피스 말이에요. 진품은 어깨 스트랩이 엘라스틱 밴드거든요. 저지가 아니구." - P110
이런 시골 바닥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애들과는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던 백은조처럼. 그래서 일부러 아득바득 우겨 가며 패션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서울로 올라간 백은조처럼. 세탁소집 딸내미였던 게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 없었다고 했던 건 사실 거짓말이다. 나는 여전히 여길 벗어나고 싶고 있어 보이는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싶다. 그러니까 이제 인정해야 한다. 나는 이 동네를 떠나기 위해 여태 백은수 핑계를 대고 있었다는 걸 언니 이름만 들어도 아파서, 그래서 도망친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이쯤에서 이제 정말 이 동네에서의 내 평판을 신경쓸 때가 되었다는 것도.
인생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다. 모두가 화면 속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살 수도 없다. 하지만 화면 밖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살아가고 있다. 잔잔하고 심심하게. 그리고 아주 평범하게.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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