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가 제일 많이 들어오는 시기가 딱 초여름 이맘때다.
날이 따뜻해져 트렌치코트를 입기 시작할 때부터 한여름까지. 손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온갖 겨울옷을 들고 세탁소를 찾는다. 맡긴 옷을 찾아가는 건 다시 계절이 바뀌고 아침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해질 때쯤, 그런 식으로 옷장 안에 있는 짐을 줄이는 거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푹푹 찌는 한여름의 세탁소에는 겨울옷이 가장 많다. 물론 겨울엔 정반대다.
그러니까, 세탁소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지나온 계절을 보관하는 박물관 같은 공간이다.
이 안에서는 늘, 이미 지나 버린 계절의 흔적들이 수장고 깊은 데 보관되어 있는 유물처럼 두 달이고 세 달이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동시에 세탁소는 오늘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나풀거리는 화려한 무늬의 원피스를 수선할 때나 제법 값이 나가 보이는 리넨 블라우스를 보기좋게 다릴 때가 되면 정말 귀신같이 가게 앞 아스팔트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매미가 울어 댄다. 무슨 돌림노래처럼 쓰피오쓰피오쓰피오 하고 울던 소리가 멈추면 곧장 다른 쪽에서 밈밈밈미이이이이 하면서. - P33

모든 느리고 작은 것은 언제나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정말 쓸데없이. 쓸데없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 P41

세탁소에 오는 모든 옷에는 그 주인의 취향, 습관, 취미, 직업 같은 정보가 묻어 있다.
여태 한 번도 가족들 중 누군가가 대신해서 세탁소에 오는 일이 없던 여자 손님 집에서 남편이라는 아저씨가 본인 옷이라며 와이셔츠를 맡겼을 때. 그런데 그 전까지 그 집에서 오는 세탁물에서 셔츠나 정장을 발견한 적이 없을 때. 그의 가족 중 누구도 그가 셔츠를 맡겼다는 걸 모를 때. 값싼 셔츠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브랜드의 보디 오일 자국과 향이 목깃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을 찾아냈을 때.
옷을 만지고 들여다보는 모든 순간 무심하게 스치듯 본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 P124

보라고? 뭘?
"어………. 쟈니 사장님 옷 아니에요?"
"웅, 우리 바깥양반 옷."
골프웨어 브랜드 하나, 등산복 브랜드 하나. 50대 초중반 아저씨들이 입을 법한 전형적인 디자인과 컬러의 칼라 티셔츠 두 벌과 바지 한 벌. 뭘 보라는 건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작업대 앞 선반에 달린 클램프 스탠드를 켰다.
첫 번째 옷은 칼라부터 소매, 몸통의 이 끝부터 저 끝까지 살핀 후에 안감이 밖으로 나오도록 옷을 뒤집어 다시 훑어도 별달리 특이한 게 없었다.
두 번째 칼라 티셔츠를 조명 밑에 펼치고 나서야 나는 원장님이 여태 옷이 아닌 내 얼굴을 살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왜 이렇게 옆얼 굴이 따갑도록 집요하게 내 표정을 살피는지도.
원장님은 쟈니 사장님 옷에서 내가 뭔가를 발견하는 그 찰나를, 내 표정이 변하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무슨 이유로든, 원장님은 지금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으니까.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그놈의 다이아 반지 사건이 실은 불륜 치정극이었다는 증거를 잡아낸 게 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별다른 내색 없이 옷 세 벌을 모두 살핀 후에 스탠드를 끄고 천천히 옷을 개기 시작했다. - P134

"딱히 수선할 곳도 없고 세탁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데요? 혹시 사이즈가 안 맞나요? 사이즈 수선하려면 직접 오셔서 입고 확인하셔야 되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저절로 말이 길어진다. 찔리는 쪽은 혀가 긴 법이랬는데 지금 내가 딱 그 짝이다.
"이 딸내미가 미련 곰탱인 줄 알았더니 아주 여시 깍쟁이구만."
"네?"
"얼른 줘. 가게."
쟈니 사장님 옷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원장님이 찾던, 혹은 찾을까 두려워하던 흔적뿐 아니라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게 단 하나도 없었다는 소리다.
아마 원장님도 알고 있었을 거다.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달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어도 남편의 옷에서 뭘 찾아야 하는지 내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걸. 끝까지 여상한 척하며 자존심을 세우려 애쓰는 원장님에게 내가 장단을 맞춰 준 것도 그리고 정말로 남편의 옷에는 평소와 다른 그 무엇도 없었다는 것까지.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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