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던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카페를 찾았다. 좋아하는 라테를 주문하고 전자책을 꺼냈다. 1시간이 흘렀지만 페이지는 단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때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Can you do me a favor? (부탁 좀 들어줄래요?)"

정신이 바짝 들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한 손에 포스트잇과 볼펜을, 그리고 한쪽 어깨에는 커다란 백팩을 걸친, 정돈되지 않은 머리의 백인 남자가 서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나 싶어 가방을 챙겨 얼른 일어날 채비를 했다. 그러자 그는 노란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고서 나에게 건넸다. 거기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Stay awesome. (계속 멋있어줘요.)

쪽지와 친절한 웃음을 남기고는 그는 유유히 카페를 나갔다. - P235

가끔은 누군가에게 별 이유 없이 그냥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르는 남자가 건네고 간 그 작고 노란 포스트잇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미국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 P237

이런 일들을 겪으며 조금이나마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헛짓거리라 생각하며 벌여온 일들이 (금전적 보상은 아니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꼭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늘 내 인생이 하루살이 같다고 생각했었다. 지친다 싶으면 간신히 동아줄을 내려 살려주고, 살 만하다 싶으면 또다시 시련이 던져지고, 다시 기회가 찾아오고….. - P258

모두가 퇴사 후 여행을 외친다. YOLO(욜로)라는 말도 이제는 식상한 것 같다. 팍팍한 현실에서 장기 여행만이 답일까. 요즘 드는 생각은 현실과 미래 사이를 열심히 저울질하며 버티던 지난 10여 년간의 모든 순간이 어쩌면 여행이었던 것 같다. 살아가듯 여행하다 보니 결국 인생을 여행한 꼴이 되어버렸다. - P282

매년 우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가득 채워 보냈던 12월. 그러나 올해의 첫 일출은 처음으로 조금 설레었다. 여유가 조금은 생긴 모양이다. 여행을 하며 사는 삶을 보고 누군가는 운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행운도 나에게 들어올 공간이 있어야 다가온다고.

빡빡한 계획과 욕심으로만 마음을 채우면 눈앞까지 다가온 행운도들어갈 곳 없어 떠나버리지 않을까. 나는 영원히 유연하지만 단단한 나만의 공간을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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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가 되기 전에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나또한 단 1초라도 먼저 키보드를 잡고 싶지 않았다. 순간 ‘10년 뒤 1시‘ 그때도 이렇게 벽시계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는 내 모습이 하얀 벽 위로 뚜렷하게 그려졌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아프리카 들판을 누비고 바람을 느끼던 그때의 결심처럼 살아가리라. - P157

그렇게 나는 별다른 계획도 목표도 없이 무작정 퇴사를 결심했다. 적어도 10년 뒤 1시의 내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리라는 희망을 품고.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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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거리는 게 아냐, 단지 약간 불만스럽다는 거지.」
「팔자 편한 소리!」
이 말다툼은 우리를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보이게 했다. 더 젊기는 해도, 우리는 그녀가 소설에서 묘사하는 그 성깔 더러운 여자 술꾼들과 닮아 있었다. 작가는 미래를 즉각적으로 예언하는 성격에 의해 식별된다. 내 『황산』이 리얼리티 방송의 변천을 통해 현실로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신경질적인 여자들은 그 가을날의 말다툼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페트로니유 팡토가 진정한 작가라는 것을 증명했다. 꼭그래야 했다면 말이다. - P131

페트로니유가 위험을 무릅 썼고, 또다시 이 정도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극도의 흥분, 내가 존재한다는 감정의 황홀한 팽창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 P178

한편, 나는 수로 밑바닥에서 얌전한 시체가 되어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나한테 아무 쓸모도 없는 교훈들을 얻는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목숨이 위태롭게 된다는 걸 아무리 알아도 소용이 없다. 매번 걸려들고 마니까.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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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나는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한 빌라의 창문을 통해 페트로니유의 소녀 시절을 얼핏 본 것 같았다. 극좌파의 이상에는 찬동하지만, 뻔뻔할 정도로 추하기만한 골동품, 충격적일 정도로 멍청한 독서,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의 미학에 거부감을 느끼는 부조리하게도 귀족적인 취향을 가진 소녀의 진정한 고통을.
나는 다시 페트로니유를 바라보았다. 붉은 고추를 닮은 눈을 가진 불량소년의 외모, 탈옥한 죄수 같은 근육질의 탄탄하고 작은 몸, 그리고 크리스토퍼 말로와 닮아 보이는 얼굴의 신기한 부드러움, 그녀는 양갓집 아가씨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그녀도 말로처럼 <나를 부양하는 것은 나를 파괴한다>를 좌우명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양식이 되어 준 위대한 문학은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만큼 그들 사이에 더욱더 깊은 골을 파놓음으로써 그녀를 외톨이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도 했다. - P121

「천만에 그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야. 난 너를 관찰 했어. 너한테 재능이 없다는 말이 아니야. 난 너를 오랫동안 관찰한 후에 재능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어, 비밀은 너의 광기야.」
「네가 나보다 천 배는 더 미쳤어. 약을 먹든 안 먹든!」
「난 너의 광기라고 말했어. 네 나름의 미치는 방식 말이야. 미친 사람들은 사방에 널렸어. 하지만 너 같은 미치광이는 존재하지 않아. 네 광기가 어떤 건지는 아무도 몰라. 너조차.」
「사기가 이뤄지는 게 바로 거기야. 사람들은 아무도 너와 같은 연료를 사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너 때문에 작가가 돼.」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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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와인을 맛볼 때 <안주 챙겨 먹기>를 강요하는 사람들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음식에 대한 모욕이고, 음료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안그러면 취해 버리거든요." 설상가상 그들은 이렇게 웅얼거린다. 난 그들에게 예쁜 아가씨들에게 아예 눈길도 주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다. 반해 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으려 드는 것은 성스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숭고한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만큼이나 불명예스러운 행동이다. - P6

이러한 자아상실은 하나의 열락이었다. 나는 샴페인의 정령이 내 행동을 칭찬하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귀한 손님으로 내 안에 맞아들여 극진히 대접하자, 그 정령은 그 대가로 나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최후의 난파까지도 하나의 은총이었다. 율리시스에게 귀족적인 무모함이 있어 제 몸을 돛대에 묶지 않았다면,
그는 샴페인의 궁극적인 힘이 날 이끌어 간 곳까지 날 쫓아왔을 것이고, 나와 함께 사이렌들의 금빛 노래에 흔들려 가며 대양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 P10

빵을 나눠 먹는 사이라는 어원을 갖고 있는 <동무 compagnon〉라는 낱말 자체가 벌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술친구 comvignon〉였다.


*compagnon (동무, 동료)가 pain (빵)을 함께 나누는 사이라는 의미이듯이, comvingon은 vin (와인)을 함께 나누는 사이라는 의미로 만든 조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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