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몸을 웅크려 내리꽂히는 발길질을 그대로 받아내던 때, 영은 물러 터지고 피가 흐르는 상처 위로 돋아날 새살을 생각하곤 했다. 그 살이 다시 터지고, 찢어지고, 새살이 돋아나는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영은 감각에 무뎌졌다. 어떤 물리적 상해나 고통에도 무감해졌다. 량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영은 발길질도, 주먹질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은 자신의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온몸을 절절 끓게 만드는 이비였다. 밤바다의 달빛 아래에서 파랗게 터지는 웃음소리였다. - P65

영은 량의 몸 위에 올라타 그가 자신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얼굴의 모든 부위를 조각냈다. - P66

이비는 온 힘을 다해 영을 끌어안았다. 그때 여기저기서 낮은 기계음이 들렸다. 눈두덩이가 벌겋게 멍든 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모든 데이터 디스펜서들과 스페셜리스트들의 총구가 자신과 이비를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물러서라, 이비."
아태가 낮게 명령했다. 하지만 이비는 영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비는 안도했다. 영이 아직 살아 있구나. 영은 자신의 어깨가 이비의 눈물로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영은 안도했다. 내가 아직 이비와 함께 살아 있구나. 영은 안간힘으로 이비에게 귓속말을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바다로 데려가 줘."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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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
이비는 겨우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처음 부르는 그의 진짜 이름이었다. 시안이라고 불리던 그를 진짜 이름으로 부른다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비는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영이라고 부르는 순간, 이비는 플라스마 건을 쏘려던 결심이 철저히 무너졌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 그냥 도망가면 안 될까?"
이비는 상상력의 대가였다. 괴상한 것이든 훌륭한 것이든 닥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 이비가 꺼낸 우리의 미래가 고작 도망이라니. 영은 이비가 대단히 멍청하고, 여전히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상상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이 아이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영은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다 없었던 일인 셈 치고 홀연히 떠나 버린다면. 어둠 속에서 웃었던 그때의 바다로 숨어 버린다면. 영은 이비의 말이 너무나 유혹적이라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비가 되고 싶어 흔들렸던 매 순간을 잊기란 불가능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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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화가 끝났다. 이제 테스트를 해 보겠다."
아태는 둘 중 덩치가 조금 더 큰 이비 앞으로 다가갔다.
"배에 힘!"
"예?"
"힘주라고."
아태가 이비의 배에 냅다 주먹을 꽂았다. 이비가 뒤로힘없이 밀려났다. 그런데 영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통증에 놀란 표정이었다. 이비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온몸이 덜덜 떨려서 쉽게 일어나질 못했다.
"페인 체인(pain chain)이라고 하는 거다. 고통을 공유하게 하지. 서로 같은 신호를 띠는 페인 체인은 세상에단 한 짝밖에 없다. 일어서!"
이비가 책상을 짚고 겨우 일어났다. 그의 눈에 눈물이그렁그렁 맺혔다. 영은 통증을 꾹 참아 내느라 이를 앙다물었다.
"데이터 디스펜서와 스페셜리스트는 한 몸이다. 전장에서 둘은 마치 한 쌍의 신발이나 젓가락처럼 함께 움직여야 해. 한쪽의 고통은 곧 다른 쪽의 것이고, 그건기쁨도 마찬가지다. 너희 둘 사이에 각자의 것은 없다. 오직 서로의 것이 너희를 살린다. 페인 체인을 통해 너희가 배울 점이 있기를." - P27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다 묻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네게도 묻어 버리고 싶은 것이 있었을 거다.

남에게 맞는 것도 아프고, 남을 때리는 것도 아프다. 넌 두 가지를 다 했다. 너에게 뺨을 맞았을 때 나는 너의 손바닥을 생각했다. 남의 뺨도 아닌 자기 것을 때리는 손바닥의 비참함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그 비참함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설령 모른다고 해도 묻고 싶었다. 혹시 알고 싶은 것은 아니냐 묻고 싶었다. 너의 슬픔을 너는 아느냐고, 알고 싶냐고 묻고 싶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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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님께서 딸에게 주신 재능은 주님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지, 세속적인 서커스를 하기 위한 게 아니라고 소리질렀다. 아내가 그토록 즐겨 다니는 경박한 진창에 딸까지 끌고 들어가지는 말라고 했다. 딸이 이런 식의 지적 매춘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P52

헬렌은 싸움이 벌어지는 내내 자기 발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를마주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입이 그 무분별한 말을 만들어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꼴을 보면, 이제는 아버지가 말을 하더라도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를 통해 말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이 확인될 테니까. 발만 보고 있으면, 그 목소리는 그냥 폭언을 쏟아붓는 목소리일 뿐이었다-아버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주인없는 고함. 위협적인 말투보다 더 무시무시했던 건 아버지의 장광설에 아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었다. 헬렌이 보기에 의미에 가하는 폭력만큼 심한 폭력은 없었으니까 - P52

헬렌의 재능은 대단히 희박한 확률을 뚫고, 엄청나게 엄격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꽃피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혹독하고 두서없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게 싫었지만, 아버지의 구속이 어머니의 사교성보다 딱히 더 억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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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두 눈은 몬태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보라색 호박 같았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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