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그저 솔직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자격을 - 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 - 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다음 일은 또 그다음 일입니다. - P58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많은 경우, 구체적인 형태에 의한 게 아니면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진실입니다. 문학작품의 질은 어디까지나 무형의 것이지만, 상이든 메달이든 그런 것이 주어지면 거기에 구체적인 형태가 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형태‘에 눈길을 던질 수 있습니다. - P73
창조성에는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강고한 아이덴티티와 개인적인 스타일이 있어서 그것이 재능에 반영되고 녹아들어 개인적인 몸과 형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이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기존의 견해를 타파하고 상상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날갯짓하면서 마음속으로 완전한 세계를 수없이 다시 만들고, 나아가 그것을 항상 비판적인 내적 시선으로 감시하는 것을 말한다. - P88
지금도 역시 거기에서는 시대를 뛰어넘는 신선함과 박력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감은 하나의 중요한 ‘참조 사항reference‘으로서 사람들의 정신에 편입됩니다. - P91
그것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들의 그림이 오리지낼리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각이 그 오리지낼리티에 동화하고 그것을 ‘레퍼런스‘로서 자연스럽게 체내에 흡수했기때문입니다. - P94
그 스타일의 질을 논하기 이전에 어느 정도 몸집을 가진 실제 사례를 남기지 않고서는 ‘검증 대상에 오르지도 못하게‘ 됩니다. 여러 개의 샘플을 펼쳐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 않고서는 그 표현자의 오리지낼리티가 입체적으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P99
무엇이 오리지널이고 무엇이 오리지널이 아닌가, 그 판단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사람=독자와 ‘합당한 만큼 경과한 시간‘의 공동 작업에 일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작품이 적어도 연대기적인 ‘실제 사례‘로 남겨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즉 납득할 만한 작품을 하나라도 더 많이 쌓아 올려 의미 있는 몸집을 만들고 자기 나름의 ‘작품 계열‘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 P100
소설가의 일에는 많든 적든 마술사illusionist 같은 부분이 있으니까 ‘사기꾼‘이라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역설적인 상찬인지도 모릅니다. - P101
‘아직은 잘 쓰지 못하지만 나중에 실력이 붙기시작하면 사실은 이러저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합당한 내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가 항상 하늘 한복판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냥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됩니다. - P105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P106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오리지낼리티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 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충동이 몰고 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 P109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 P110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P110
오늘이라는 날 속에 또 다른 새로운 날이 생겨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기분입니다. - P113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수많은 뛰어난 문장을 만날 것. 때로는 뛰어나지 않은 문장을 만날 것. - P119
중요한 것은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일의 원래 모습을 소재=material로서 최대한 현상現狀에 가까운 형태로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아두는 것입니다. - P120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백팔십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 - P120
그것은 어떠한 세부인가. ‘어라?‘ 하는 생각이 드는, 구체적이고도 흥미로운 세부입니다. 가능하면 잘 설명되지 않는 것이더 좋습니다. 이론에 맞지 않거나 줄거리가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거나 미스터리하다면 두말할 것 없이좋습니다. 그런 것들을 채집해서 간단한 라벨(날짜, 장소, 상황)같은 걸 딱 붙여 머릿속에 보관해둡니다. 말하자면 그곳에 있는 개인 캐비닛의 서랍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물론 전용 노트를 만들어 거기에 써두는 것도 좋지만, 나는 그보다는 머릿속에 담아두는 쪽을 좋아합니다. 노트를 항상 들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일단 문자로 적어두면 그걸로 안심하고 싹 잊어버리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다양한 것을 그대로 척척 넣어두면 사라질 것은 사라지고 남을 것은 남습니다. 나는 그런 기억의 자연도태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중략) 게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그리 쉽게는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 P123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임스조이스, 완전 정답입니다. 상상력이란 그야말로 맥락 없는 단편적인 기억의 조합combination을 말합니다. - P125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좀 모순된 표현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효하게 조합된 맥락없는 기억‘은 그 자체의 직관을 갖고 예견성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올바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P126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새로운 세대만의 소설적 소재가 있고, 그 소재의 형태나 무게로부터 역산해서 그것을 실어 나를 비이클의 형태나 기능이 설정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소재와 비이클과의 상관성에서, 그 접면接의 바람직한 자세에서, 소설적 리얼리티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어떤 시대에도 어떤 세대에도 각각 고유의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소설가에게는 스토리에 필요한 소재를 꼼꼼히 수집하고 축적하는 작업이 지극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아마 어떤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이런 멋진 직업, 이거 말고는 별로 없는 거 아닌가요?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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