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은 사악니 씨. 알죠? 유명 인사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인사해주세요!"
재희는 카메라를 유심히 바라봤다. 가끔은 동그랗고 미끈한 유광의 카메라 렌즈가 기이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마치 영혼을 훔쳐 가는 디멘터처럼. - P202

"여길 어떻게......? 옴?"
오랜만에 인간과 대화하려니 어색했다. - P236

사건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하다. 사람들은 무심하다. 아니 무심하다기보다는 대부분 바쁘다. 한 사람의 죽음에 의문처럼 남은 미스터리를 오래 생각해줄 여유가 없다. 채기쁨의 기일이 오면, 그저 인스타그램에 사진 한 장 올리고, 해시태그에 RIP.라고 쓰면 땡이다. 그 정도로 기억해주는 것만도 감지덕지다. - P240

사악니가 제일 잘하는 것은 남의 험담, 혹은 한두 개의 실언을가지고 확대 해석을 해서 음모론을 퍼트리는 일이었다. 사이버렉카 일을 하면서 마음대로 쓴 짜깁기 시나리오에 해당 주인공들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해명 기사를 낼 때 사악니는 희열을 느꼈다. 세상의 조물주가 된 기분이랄까. 물론,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희열 뒤에는 반드시 허무와 깊은 염세가 따라왔다. 그래서 사악니는 더욱더 악랄해졌다. 혼자 그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스스로 뒤집어쓴 똥물을 여기저기 뛰기고 질퍽하게 만들고 싶었다. - P241

수리는 반응을 이미 예상한 것처럼 평온했다. 박현창의 피가 묻은 칼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눈동자가 암석같이 단단했다. 제 언니의 스너프 영상을 찾아 불법 사이트를 뒤질때처럼 텅 빈 심연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불이었다. 활활 타는 빨간 불이 아니라, 더 높은 열에너지를 가진 푸른 불꽃.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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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회사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화사가 꾸려 가는 세상은 마음에 들었다. 막아도, 억눌러도 사랑이란 언제나 새로 생겨났고, 낡은 법과 제도로 그것을 통제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뱅글 없이, 상대를 기만하며 몰래 다자 관계를 맺는 사람들보다는 뱅글을 통해 각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누리는 사람들이 좀 더 건강한 것 같았다. - P122

"사람들이 누구랑 무인도에 갈 거냐는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그나마 좋아하는 한 명을 고르라는 게임을 하면서."
안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은조를 응시했다.
"전 그 질문이 항상 이상했어요. 솔직히 오만하기도 하고요.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과 무인도에 가는 게 아니라, 무인도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예요."
"애정이란 게 환경에 따라 바뀌는 거라고요?"
"네. 허무하게. 관계는 늘 임시적이잖아요."
"상황에 따라 변동할 뿐이다?"
"맞아요. 그러니까 컬러 필드는 말장난을 하는 거예요. 열린 관계를 말하지만 사실 상황과 조건을 설정한 거죠. 이 안에서 소비하며 즐기라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한선 안에서." - P122

"저는 지난 연인들의 색으로 작업을 해요. 작업은 보통 한 사람마다 두 달 이상 걸리죠. 사귄 시간보다 작업 기간이 더 길 때가 많아요. 처음 작업한 컬러는 다크 피치인데요. 수백 개의 복숭아색을 찾아 초대형 화폭에 붙이고, 또 붙이다 보니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막막한 심정이 좋더라고요. 찾는 것은 제 앞에 오지 않지만, 떠나간 것은 제 안에 남아 있다는 역설. 저는 거기서 이상한 평온을 느꼈습니다."
작품들의 제목은 모두 ‘X‘였다. 갤러리엔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연인과의 추억은 도려내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그냥 두는 거죠. 내가 그 사람들을 돌보고, 그 사람들도 나를 돌보는 거예요. 사는 일과 똑같아요. 혼자 버틴다고 생각해도 그렇지 않잖아요." - P178

얼기설기 세워뒀던 마음이 무너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잔에 공기를 담으면 누군가 만들어준 칵테일처럼 달고 향긋한 맛이 날 것 같았다. - P179

하지만 용기는 두 발로 달리는 동안 커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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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컬러 필드야. 언제든 누구든 만날 수 있는."
"그건 너희 회사 생각이지."
백환의 목소리가 커졌다.
"내 생각에 사람은 사실 늘 같은 트랙을 돌고 있을 뿐이야. 그렇게까지 넓고 복잡한 존재가 아니라고, 끝없이 갱신한다? 나날이 확장한다? 그럴수 없어."
안류지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인간의 호르몬 변화. 어차피 기한이 있는 애정. 듣고 싶던 답이 아니었다. 별수 있니? 도리가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지내면 돼. 네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너를 알게 될수록 더 알고 싶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시든다는 말을 하는 백환 앞에서 안류지는 기운이 빠졌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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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것이 아름다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한한 것이 소중한지도 알 수 없었다. 초라하다는 말을 내뱉고 나자, 드러나지 않게 백환을 판단해 왔던 자신 역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77

헛된 욕심을 내지 않는다. 발치에 자질구레한 요행을 흩뿌려 놓고 뒤통수에 거대한 불행을 떨구는 게 인생. 그러니 헛된 욕심을 내지 않는다. 허황된 꿈을 꾸지 않는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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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과 달리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색은 없었다. 중요한 건 색과 색 사이, 배색의 조화였다. 같이 SF를 읽고 앰비언트뮤직을 듣고 선댄스 수상 영화를 보는 연인이라 해도 뱅글 색은 비슷하지 않았다.
함께 코믹스를 읽고 J-POP을 듣고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연인끼리도 뱅글 색이 겹치지 않았다. 서로 반드시 만나야 하는 색, 서로 절대 만나면 안 되는 색을 점치는 글이나 영상물은 온라인 공간에서 늘새롭게 만들어졌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색에도 어울리는 색이 있다는 것. 그때그때 가까이하고 싶은 색은 달라진다는 것.
다만 비슷한 계열의 색상끼리는 느긋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서로 대비되는 보색끼리는 격렬하고 전투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침마다 산책로를 따라 걷는 커플은 라이트 그레이와 빈티지 그레이의 조합,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않고 길에서 고래고래 싸우는 커플은 네온 옐로와 딥 퍼플의 조합인 식이었다. - P16

한낱 호르몬의 지령을 그대로 따르는 수동적인 자세가 점성술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리는 것과뭐가 다르냐는 말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한번 찬 뱅글을 잘 빼지 않았다. 뱅글러들은 소통이나 진정성이란 단어에 진저리를 쳤다. 이 두 단어를 즐겨 쓰는 이들이야말로 연애를 성급히 망치곤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더욱이 기후 재난의 정점에 태어난 세대는 노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끝이 보이는 지구에서한 사람 곁에만 머무는 일이 매력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고 여겼다. 피임 기술과 성 질환 치료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이곳에선 가능한 여러 사람과 삶을 꾸려 보는 것이 합리적인 자세였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다시 없을 짝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운명론자들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젊은 층 다수에게 남은 인생을 단 한 사람과 보내려는 태도는 덥고 습하게 느껴졌다. 이별을 늘 묵직한 비극이나 해괴한 부조리극으로 만드는 것, 헤어진 연인을 철천지원수로 대하는 것도 전 세대의 구태의연한 관습이었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반드시 나쁜 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가까운 지인으로 바뀌고, 살면서 그런 지인들이 늘어나는 것. 어떻게 봐도 그 흐름이 덜 작위적이었다. - P17

말이 헛도는 가장 큰 이유는 원시와 문명이 혼재된 뱅글의 속성 때문이었다. 다자 관계의 원시성, 디자인을 거친 다자 관계의 문명성. 논의를 좀 더 확장한 끝에 설계와 전략을 거친 본성은 본성이 아니라고 판단한 사람들은 뱅글 같은 걸 세상에 내놓은 컬러 필드를 신뢰하지 않았다. 설계와 전략을 통해서라도 본성을 안전하게 다루는 게 낫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뱅글을 만들어 낸 컬러 필드와 협력 도시에 우호적이었다. 결국 상당수 뱅글러들에겐 강력한 공유 개념이 생겨났다. 됐다 그래. 인간이 뭐 그렇게 어려운 존재겠어. 겸허하게 색을 따르면 되지. 영원한 게 어디 있다고. - P19

그들의 매칭 성공률, 커플 만족도 예상 수치는 무려 92BG였다. 동갑인 두 사람은 열애설을 부인하지 않고 SNS에 플로깅 중인 자신들의 모습을 올렸다. 해변의 쓰레기를 주우며 걷는 둘의 데이트 사진은 성장영화의 포스터처럼 눈부시게 풋풋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브 뱅글을 쓰는 이들이 크고 작은 환경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컬러 필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시스템 보완에 힘을 썼다.
같은 컬러 계열의 뱅글러들이 공익 차원의 그룹 미션을 설정해 완수할 경우, 컬러 필드 협력 시군구에서 컬러 페이 사용 시 적립금을 3%씩 쌓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쌓인 적립금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는뱅글에 30초간 글리터 효과가 나타나는 기능도 추가했다. - P20

#에메랄드그린_환경_순례길_대원_상시_모집_중

뱅글러들은 온라인 계정에 이러한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의 뱅글 컬러, 그리고 반짝이는 뱅글 영상을 올렸다. 다자 연애를 사업의 구심점으로 둔 컬러 필드는 세간의 예상과 달리 사회 공헌에 앞장서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그해 정부 선정 최우수 기업이 되었다.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의 몇몇 시군구와 협력을 맺고 있던 컬러 필드는 곧 서울, 경기, 인천 등의 수도권까지 사업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데이팅 어플과 매칭 시스템을 개발한 회사는 많았고,
기능만 따지면 더 월등한 기술을 보유한 곳들도 있었지만 한번 치솟은 뱅글 매출액은 떨어질 줄 몰랐다. 컬러 필드로 유입되는 인구, 컬러 뱅글 사용자수는 매년, 매달 늘어났다.
무엇보다 컬러 필드는 안전한 데이트를 폭넓게 즐기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구를 처음부터 정확히짚어냈다. 컬러 뱅글은 일종의 안전 인증 표식 역할을 했다. 범죄 이력이 없어야 뱅글을 구매할 수 있기때문이었다. 뱅글의 신변 보호 기능 또한 인기의 큰요소였다. 이 기능을 활성화해 두면 뱅글을 바디 캠으로 쓸 수 있고 긴급 신고와 위치추적도 가능했다. 여성 혐오 범죄가 들끓었던 10여 년 전에 비해 쾌적해진 세상이었지만 뱅글 소지자 중 여성의 상당수는 이 기능을 켜 두고 있었다. - P22

비극에 처한 사람들에게도 습관은 붙어 있으니까. 정확히는 매일의 평범한 일상 사이로 비극이 끼어드는 거니까. - P23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건 그 사람과의 끝이 보여서일까, 보이지않아서일까. 안류지는 백환과의 관계를 늘 임시적이라고 여기는 게 남들인지, 자신인지 종종 헷갈리곤 했다. - P33

있는 그대로, 당신의 색깔로 세상을 만나세요.
Everyone Loves You, You Love Everyone.

안류지는 문구를 노려봤다. 어떻게 한 사람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사귀어. 사람이 어떻게 매일 새롭고 행복해. 광고는 남자의 분열과 착란을 조금도 비추지 않았다. 관계의 그늘과 웅덩이를 휙휙 건너뛰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광고라 해도, 영상은 너무 매끄러워 수상쩍었다. - P44

컬러 필드에 사는 사람들은 이상형에 대한 공상을 끝없이 이어 갔다. 컬러 뱅글을 드러낸 그들에게선 언제나 강한 성적 긴장감이 풍겼다. 눈빛엔 생기가 가득했고 손발은 민첩했다. 반면 컬러 필드 밖에사는 사람들은 연인과 배우자에 대한 불만을 질리도록 쏟아 냈다. 빈 손목을 쓸어내리는 그들에게선묘한 배타성과 고집이 느껴졌다. 어딘가 수줍고 차분해 보이는 이들도 뱅글에 대한 논쟁이 일면 자기의견을 굽히는 법이 없었다. 결혼, 이혼, 재혼, 별거를 반복하면서도 절대 컬러 필드 안에 들어가 살 생각이 없다는 몇몇은 항상 쓴 약을 삼키듯 술을 입에털어 넣었고 낯빛이 수심으로 가득했다. 둘 중 어느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에 오래 머무는법이 없었다. 서퍼로 불리는 이들은 컬러 필드 안팎을 오가며 사느라 양쪽 생활에 모두 익숙했고 대체로 달변가였다. - P53

"맞혀 봐. 컬러 필드가 없애고 있는 게 뭔지 알아?"
"축구 내기나 하지, 무슨 퀴즈를 내?"
문제를 낸 남자는 좌중을 둘러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예술! 금단의 사랑이 없어지면 예술도 없어지는거야."
"이 새끼 도대체 누가 데려왔냐?"
진한 카멜 뱅글을 찬 남자가 머리를 짚고는 말했다.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뱅글을 찬 사람이었다.
"사람이, 어? 애가 타고 갈팡질팡하고 정신을 못차려야 예술을 하잖아? 컬러 필드엔 그게 없어요. 금기 말이야. 결핍을 건전하게 다 채워 줘. 그래서여기엔 건강이란 질병이 넘쳐 나는 거지." - P54

안류지는 회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름에 ‘바른‘이 들어간 단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자신들은 건전하고 남들은 문란하다는 간편한 확신이 매번 애잔하게 여겨졌다. 앞으로 단 한 군데에서만 살 수 있다면, 지금처럼 컬러 필드 안에 있는 편이 나았다.
이곳에선 기껏해야 갑갑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 바깥에선 난잡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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