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회사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화사가 꾸려 가는 세상은 마음에 들었다. 막아도, 억눌러도 사랑이란 언제나 새로 생겨났고, 낡은 법과 제도로 그것을 통제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뱅글 없이, 상대를 기만하며 몰래 다자 관계를 맺는 사람들보다는 뱅글을 통해 각자의 자유를 인정하고 누리는 사람들이 좀 더 건강한 것 같았다. - P122
"사람들이 누구랑 무인도에 갈 거냐는 질문을 많이 하잖아요. 그나마 좋아하는 한 명을 고르라는 게임을 하면서." 안류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은조를 응시했다. "전 그 질문이 항상 이상했어요. 솔직히 오만하기도 하고요.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과 무인도에 가는 게 아니라, 무인도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거예요." "애정이란 게 환경에 따라 바뀌는 거라고요?" "네. 허무하게. 관계는 늘 임시적이잖아요." "상황에 따라 변동할 뿐이다?" "맞아요. 그러니까 컬러 필드는 말장난을 하는 거예요. 열린 관계를 말하지만 사실 상황과 조건을 설정한 거죠. 이 안에서 소비하며 즐기라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한선 안에서." - P122
"저는 지난 연인들의 색으로 작업을 해요. 작업은 보통 한 사람마다 두 달 이상 걸리죠. 사귄 시간보다 작업 기간이 더 길 때가 많아요. 처음 작업한 컬러는 다크 피치인데요. 수백 개의 복숭아색을 찾아 초대형 화폭에 붙이고, 또 붙이다 보니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막막한 심정이 좋더라고요. 찾는 것은 제 앞에 오지 않지만, 떠나간 것은 제 안에 남아 있다는 역설. 저는 거기서 이상한 평온을 느꼈습니다." 작품들의 제목은 모두 ‘X‘였다. 갤러리엔 서로의 손을 꼭 맞잡은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연인과의 추억은 도려내거나 없애는 게 아니라 그냥 두는 거죠. 내가 그 사람들을 돌보고, 그 사람들도 나를 돌보는 거예요. 사는 일과 똑같아요. 혼자 버틴다고 생각해도 그렇지 않잖아요." - P178
얼기설기 세워뒀던 마음이 무너질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잔에 공기를 담으면 누군가 만들어준 칵테일처럼 달고 향긋한 맛이 날 것 같았다. - P179
하지만 용기는 두 발로 달리는 동안 커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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