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식스가 죽었을 때보다도, 파이브한테 일이 생겼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어. 종료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는 네가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계속 통신 가능한 거리에서 비행하고 있었어. 결국 포기하고 돔 격납고로 돌아온 다음에도 조종석에 앉아서 한 시간을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불멸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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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내 마음속 혼돈은 화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카메라 앵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내 얼굴엔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지만, 그건 편집자의 관심 밖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의 시선에서는 사소한 배경으로 뭉뚱그려질 뿐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무게가 드러나지 않음에 감사하면서도, 그간 봐왔던 수많은 방송들 속에서 나는 과연보려고 마음먹은 것을 본 건지, 누군가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덥석 건네받았을 뿐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P130

나는 촬영 이후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일권 PD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과 그의 실루엣을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잠깐 동안 괴로워했다.
그러나 꺼림칙한 것을 담아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PD가 게시글 너머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아직 촬영 중인 것 같았다. 그의 데뷔작보다 훨씬 더 길고 너른 배경의, 그리고 한층 더 꺼림칙한.
싫은 사람의 수는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쯤 될 테니 그가 소재 고갈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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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쉬지 않고 설명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학교 MT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마피아 게임이 떠올랐다. 여기서 얘기하는 술래를 마피아와 동일 선상에놓고 본다면 이건 내가 잘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처음으로 다 같이 고개를 들었을 때 마피아로 지목된 친구의 알 수 없는 설렘 가득한 표정-아마도 게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으쓱함과 그에 상응하는 부담감이 섞인 표정을 기가막히게 잡아내곤 했다. - P22

하지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은 누군가 몰랐으면 했던 내 모습이 공공연하게 까발려졌을 때 애써 태연한 척하는 표정도 그와 무척 닮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를 포함한 여덟 명은 자기도 모르게 같은표정을 짓고 있었다. - P23

이일권 PD가 지원자를 받지 않고 직접 우리를 캐스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리고 동료들이 추천했다는 말의 의미가 초 단위로 몸에 따갑게 새겨지고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캐스팅되었다. 단 한 명, 술래를 제외하고는. - P23

만약 술래를 단독으로 찾아내는 행운이 따른다면 1억 원이 훌쩍 넘는 돈을 가져갈 수있다는 계산에 이르자, 순조롭게 액수만큼의 의욕이 더해졌다. 그건 밑바닥에서부터 출연 의욕을 끌어올려주기에는 어딘가 모자랐지만, 간당간당했던 수위를 넘쳐흐르게 하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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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상황에서 구출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을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 지어지든 나는 친한 친구의 기준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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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느냐?"
어깻죽지가 찢어진 내 옷가지가 방금 전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자 중영은 부드럽고 깊은 그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말하고 죽음을 면하려느냐, 죽어서 비밀을 지키려느냐?"
나는 분했다. 중영에게나 봉선에게나, 지킬 의리도 절개도 한치 없는데 말하기가 두려운 것이 분했다.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며 나는 자백했다.
"중랑장 여봉선 장군입니다."
"알았다." - P209

"대체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찌 동 씨와 여씨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습니까?"
퇴궐하신 아버지는 들떠 물었다.
"말씀을 낮추세요, 아버지."
내가 봉선과 중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견딘 것뿐.
"저는 다만 두 사람 모두 제가 그를 연모한다 믿도록 애썼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연모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연모하였습니다.
"대답해드리면 제 원을 들어주시려는지요?"
견디다 못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또 그것은 어찌 가능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버지, 당신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를 아내로 맞아주십시오."
아버지는 내 청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셨다. - P218

중영이 죽기 전에 ‘천리초 십일복‘이라는 노래가유행하였다고 한다. 지천에 널린 풀 가운데 수명 열흘을 점칠 것이 없다는 뜻일 터. 동중영의 이름 탁을 파자하여 지은 노래이니 중영이어서 실권하기를 바란 것이로되 어차피 끝날 권세 잡음이 무상하다는 뜻도 될 터. - P220

죽는 것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기억도 어렴풋할 만큼 까마득한 어릴 때 나는 이미 부모에게서 달아난 적 있었다. 이웃 애와 나를 바꾸어 먹으려는, 나를 죽이려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사모한 것은 그가 나를 살려주어서였다. 이제 와서 나더러 죽으라 했다고 사모의 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로되 그것이 내가 따를 수 없는 명인 것은 여전했다.
바닥이고 옷자락이고 피범벅이었다. 나는 갈 곳도 모르면서 문을 나섰다. - P224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젊고 아리따웠던 초선은 어디로 갔을까.

혹자는 내가 봉선을 따라가 조용히 가정에 종사하였다고믿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조맹덕에게 거두어져 관운장에게 하사되었다고 한다. 관운장은 내 의기에 탄복하여 나를 거두기도 하고 나라를 망칠 요녀라며 나를 죽이기도 한다. 나는 때로의리를 지키고자 관운장의 검 앞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닳디닳은 정조를 한탄하며 몰래 자결하기도 한다. 진작에 아버지를따라 자결하였음을 굳게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살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죽는다.

죽다니, 내가?
웃기고 있네. - P229

분분한 설화들을 소거하다 보면 그가 기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탁의 무시무시한 위세는 천하 군웅의 힘을 모아서도 제압하기 어려웠으되, 그처럼 강력한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우리가 익히 아는 영웅들이 삼국지라는 역사-서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동탁에게는 강력해야 할 개연이 있었고, 개연을 업어 무적이 된 악당을 무너뜨리려면 무력을 제외한 다른 수단이 동원되어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자가 하나 필요해진다. 어떤 영웅-남자도 동탁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여자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동탁이 수족처럼 여기는 여포와 반목하게 될 만큼 아름답고, 정조보다 대의를 중하게 여길 만큼 충절이 높은 여자. 초선은 이야기마다 다르게 자라 다르게 죽지만 미모와 충절만큼은변치 않는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탁의 위세가 그렇듯초선의 미모와 충절에도 강력한 개연이 뒤따른다. 그것으로당대의 어떤 영웅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낸다. 그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마나 편리한 여자인가 - P233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이야기였는지 묻지 않겠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는 살아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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