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느냐?"
어깻죽지가 찢어진 내 옷가지가 방금 전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망설이자 중영은 부드럽고 깊은 그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말하고 죽음을 면하려느냐, 죽어서 비밀을 지키려느냐?"
나는 분했다. 중영에게나 봉선에게나, 지킬 의리도 절개도 한치 없는데 말하기가 두려운 것이 분했다.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며 나는 자백했다.
"중랑장 여봉선 장군입니다."
"알았다." - P209

"대체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찌 동 씨와 여씨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았습니까?"
퇴궐하신 아버지는 들떠 물었다.
"말씀을 낮추세요, 아버지."
내가 봉선과 중영의 마음을 사로잡았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견딘 것뿐.
"저는 다만 두 사람 모두 제가 그를 연모한다 믿도록 애썼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연모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연모하였습니다.
"대답해드리면 제 원을 들어주시려는지요?"
견디다 못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이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또 그것은 어찌 가능했느냐고 물으신다면, 아버지, 당신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저를 아내로 맞아주십시오."
아버지는 내 청을 무시하고 자리를 뜨셨다. - P218

중영이 죽기 전에 ‘천리초 십일복‘이라는 노래가유행하였다고 한다. 지천에 널린 풀 가운데 수명 열흘을 점칠 것이 없다는 뜻일 터. 동중영의 이름 탁을 파자하여 지은 노래이니 중영이어서 실권하기를 바란 것이로되 어차피 끝날 권세 잡음이 무상하다는 뜻도 될 터. - P220

죽는 것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기억도 어렴풋할 만큼 까마득한 어릴 때 나는 이미 부모에게서 달아난 적 있었다. 이웃 애와 나를 바꾸어 먹으려는, 나를 죽이려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사모한 것은 그가 나를 살려주어서였다. 이제 와서 나더러 죽으라 했다고 사모의 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로되 그것이 내가 따를 수 없는 명인 것은 여전했다.
바닥이고 옷자락이고 피범벅이었다. 나는 갈 곳도 모르면서 문을 나섰다. - P224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젊고 아리따웠던 초선은 어디로 갔을까.

혹자는 내가 봉선을 따라가 조용히 가정에 종사하였다고믿고 또 어떤 이는 내가 조맹덕에게 거두어져 관운장에게 하사되었다고 한다. 관운장은 내 의기에 탄복하여 나를 거두기도 하고 나라를 망칠 요녀라며 나를 죽이기도 한다. 나는 때로의리를 지키고자 관운장의 검 앞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닳디닳은 정조를 한탄하며 몰래 자결하기도 한다. 진작에 아버지를따라 자결하였음을 굳게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살고 어떤 이야기에서는 내가 죽는다.

죽다니, 내가?
웃기고 있네. - P229

분분한 설화들을 소거하다 보면 그가 기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탁의 무시무시한 위세는 천하 군웅의 힘을 모아서도 제압하기 어려웠으되, 그처럼 강력한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우리가 익히 아는 영웅들이 삼국지라는 역사-서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동탁에게는 강력해야 할 개연이 있었고, 개연을 업어 무적이 된 악당을 무너뜨리려면 무력을 제외한 다른 수단이 동원되어야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자가 하나 필요해진다. 어떤 영웅-남자도 동탁을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여자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동탁이 수족처럼 여기는 여포와 반목하게 될 만큼 아름답고, 정조보다 대의를 중하게 여길 만큼 충절이 높은 여자. 초선은 이야기마다 다르게 자라 다르게 죽지만 미모와 충절만큼은변치 않는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탁의 위세가 그렇듯초선의 미모와 충절에도 강력한 개연이 뒤따른다. 그것으로당대의 어떤 영웅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낸다. 그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마나 편리한 여자인가 - P233

이리하여 이야기의 필요로 발명된 여자는 살아서 이야기를빠져나간다. 나의 초선은 살아남는다. 이것이 당신이 원한 이야기였는지 묻지 않겠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여자는 살아있다. -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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