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내 마음속 혼돈은 화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카메라 앵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내 얼굴엔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지만, 그건 편집자의 관심 밖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의 시선에서는 사소한 배경으로 뭉뚱그려질 뿐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무게가 드러나지 않음에 감사하면서도, 그간 봐왔던 수많은 방송들 속에서 나는 과연보려고 마음먹은 것을 본 건지, 누군가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덥석 건네받았을 뿐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P130

나는 촬영 이후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일권 PD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과 그의 실루엣을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잠깐 동안 괴로워했다.
그러나 꺼림칙한 것을 담아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PD가 게시글 너머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아직 촬영 중인 것 같았다. 그의 데뷔작보다 훨씬 더 길고 너른 배경의, 그리고 한층 더 꺼림칙한.
싫은 사람의 수는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쯤 될 테니 그가 소재 고갈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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