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란을 일으켰는가?"
"왜 마귀에 빠진 것인가? 하느님과 성인들, 거룩한 성사를 모두 부인하였는가?"
"어떤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는가?"
"마술을 부렸는가?"
"마귀의 힘을 빌려 병을 고쳤는가?"
"연고와 마법도구를 숨겼는가? 그렇다면 누가 이런 연고를 주었으며,
이 연고로 어떤 일을 벌였는가?"
"얼마나 자주 하늘을 날았는가? 누구와 함께 하늘을 날았는가? 이 짓을함께 모의한 사람의 이름을 대라!"
"지하로도 들어갔는가? 누구와 함께 들어갔는가?"
"동물로 변장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어떤 동물로 변장했으며 언제 어디서 그런 짓을 했는가?"
"폭우, 비, 천둥, 번개, 우박을 만든 적이 있는가?"
"어떻게 마귀와 성교를 하였는가? 이 때문에 부부 사이에 문제는 없었는가?"
"독극물을 만들었는가?"
"마귀의 말과 축복을 사람들에게 전한 적이 있는가?"
"언제 하늘을 날았으며 어느 장소에서 비밀 집회를 열었는가? 이 집회를 이끈 자는 누구이며 몇 명이 참석했는가? 거기서 어떤 사항을 결정하고행동했는가?"
(출처:사학자 볼프의 저서에서) - P94

유럽에서 자행된 고문의 역사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던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행위인 고문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채찍이나 회초리를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고문은 물론 식초를 코에붓거나 뜨겁게 달군 무거운 쇳덩이로 가슴을 누르거나 사람을 기둥에 묶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문을 자행했다. 결혼을 파탄시킨여자의 가슴을 절단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의 고문 방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한 단계더 나아가 더욱 정교하고 잔인하게 고문 방법이나 고문기구들을개발하고 발전시켰다. 가장 참혹한 고문 중 하나는 사람을 굶주린짐승의 우리에 가두어 죽이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63~ AD14) 황제의 명령으로 사지가 잘린 채 연못에 던져서 물고기의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 P98

이런 신의 시험이 반복되니 학습의 동물‘ 인간은 지혜를 발휘하여 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방편을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이런사실들을 본다면 인간은 신보다 전지전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지혜는 신을 능가하는 듯하다). 당시 중세의 기사였던 누군가가 생각해 낸 이 방법은 불에 들어가기 전에 온몸에 왁스칠을 하는 것이었다. 왁스가뜨거움을 막아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 연관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샤를마뉴(Karl derGrosse, Charlemagne, 742~814, 카를대제라고도 한다)의 부인인 리카르다Richarda가 한 주교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녀는 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불 시험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는 불타는 석탄 위로 걸어들어갔지만 전혀 다치지않고 무사히 나옴으로써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하인리히 2세(Heinrich II,973~1024)의 부인 쿠니쿤데 Kunigunde도 이런 신의 시험에서 살아남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독일의 도나우에슁엔 Donaueschingen 이라는 도시에 전해내려오는 기록물 중에는 안YAnna Henne 라는 여자가 뜨겁게 달궈진 무거운 쇠를 들고 불구덩이에 들어갔는데도 다치지 않고 통과하여 마녀혐의를 벗었다는 기록이 있다. 앞에서 여러번 언급한 책 『마녀망치』에도 1486년 불 - P100

시험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인간이 뜨거운 불 속에서도 다치지 않고 나올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많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시험 전에 앞에서언급한 왁스를 미리 온몸에 발랐을 수도 있고 아픔을 덜 느끼거나덜 다치도록 하는 약초를 복용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재판관에게돈을 주고 적절하게 타협한 후 형식적으로 시험을 치르는 척했을수도 있다. 17세기 독일의 유명한 의학자 엘리아스(Elias RudolphCamerarius, 1641~1695)는 손이나 입술에 뜨겁게 달군 쇠를 대는것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미 약초로 만든연고나 여기에 준하는 그 무엇을 준비해서 사용한다면 얼마든지손이나 입술에 달구어진 쇠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효력이있는 약초로 알라우너Alraun를 꼽았다. 이 약초는 만드라고라(mandragora, 『해리 포터에 나오는 맨드레이크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과의 유독식물인데, 뿌리의 모양이 사람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독일 헤름스테트Helmstedt 지역에서는 뜨거운 것에 데여 화상을 입었을 때 유황으로 만든 비누 등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유황을 온몸에 바르거나 암모니아수나 양파와 혼합하여 사용해도효력이 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광석의 고운 가루나 알테아Eibisch의즙 그리고 사리풀henbane 같은 약초도 사용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이 불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신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로 시험에 통과할 수있도록 미리 조처를 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시는 죄가 없는자에게는 신이 기적을 일으켜 보호해 준다고 믿던 시대이다. - P101

그리스 로마 시대에 노예에게 동물처럼 낙인을 해두었던 관습은 중세까지 이어졌다.
신성 모독을 저질렀을 때에는 B(Blasphemie, 신성모독),
도망치다 잡힌 노예의 눈썹 위에는 F, 집시처럼 방랑하는 자들에게는 R 혹은 V, 도둑은 T. 살인자는 M, 위증죄는 P. 추문을 일으킨 자는 SL이라는 낙인을 새겼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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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마귀나 데몬이 인간의 몸이나 동물의 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녀사냥을 정당화하는 각종 학설이나 논거가 지지를 받게 되었다. 정상적인 사람은하느님 안에서 평온하지만 마귀나 데몬이 몸으로 스며들게 되면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며 인간을 해치고 날씨를 나쁘게 만드는등의 악행을 저지르게 되니 이를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힘을 행하는 자들을 마녀라고 칭하게 되었으며(이 책에서는 마귀나사탄, 데몬, 악령 등을 모두 ‘마귀‘로 통일하여 서술하였다) 이들을 처단할이론적 기반도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P16

사학자 마이어 Meyer는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의 민중은 곤궁과 가난에 찌들었고 하루하루 생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도피처를 찾아다녔다. 즉 식물에서 추출한 액체를 마시고 황홀이나 흥분, 무아경 속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 액체를 마시면 마실수록점점 더 강렬한 자극제나 흥분제를 필요로 했고, 그러다가 중독증상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다."
마이어는 이런 상황을 마녀와도 연관 짓는다. 그 증명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헥센바인 Hexenwein‘, 이름 그대로 ‘마녀와인‘이다. 이와인은 일반 와인과는 달리 씁쓸한 맛인데 마취제를 섞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P19

란덴 지방에 남아 있는 금기 자료

이번에는 독일 란덴Landen 지방에 남아 있는 1652년 경의 금기자료를 살펴보자.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 4월30일의 밤부터 5월 1일의 밤을 지칭하며 이날 마녀들이 독일 하르츠Harz 산맥의 최고봉 브로켄Brocken 산상에 모여 술을마시고 춤을 추며 논다고 알려져 있다)에 십자로에서 휘파람을 불면 마녀를불러내는 행위로 간주한다.
** 발푸르기스의 밤에 마녀의 성으로 올라가면 당장 마녀로 몰린다.
*빗자루를 들고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 보면 그 사람이 마녀인지 아닌지 당장 알 수 있다(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녀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난다‘는 주장과 관련이 깊다. 이런 주장은 오랜 옛날부터 각 문화 속에 전승되어 오다가 문명화와 더불어 사라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 누구도 이웃에게 응고된 우유가 담긴 냄비를 빌려 주어서는 안 된다.
그 냄비에 저주가 걸려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25

대부분의 수도자는 첩이나 자식을 데리고 살았다. 여기에 관해서는 문화사로서도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수도자의 독신제도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Gregor X, 재위 1271~1276)가 정착시켰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교황권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교황의 힘을 이런 방법을 통해 복원하려는 의도가 깔렸다고 볼 수 있다. 거듭 이야기했듯이 당시 가톨릭은 면죄부 판매와 폭력, 각종음모로 인해 신망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수도자의 독신제도는가톨릭이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개혁이자 구제책이었다.
그런데 당시 마녀사냥이 날뛴 여러 이유 중의 하나를 사제의 독신제도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독신제도에 갇힌 사제들이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마녀사냥에 열심히 매달렸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자연스러운 성적 본능을 강압적으로 누르다 보니 민중, 특히 여자들에게 그 화살을 돌려 본능을 해소했다는 것이다. 여자 하나를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하고 나면다시 다른 희생양을 찾아 나서길 반복하면서 억압된 성욕을 분출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마녀사냥을 이런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들의 행동은 살인이나 다름없다고 사학자 로버트 마스터즈(Robert Masters, 1713~1798)는 주장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마녀사냥의 또 다른 동참자들이 나타났다. 의사, 법률가, 공무원 등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교가 터준 길과 신학자들이 제공해준 이론으로 무장하여 잔혹한 마녀사냥에 기꺼이 동참했다. - P37

마녀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만일 마녀의 아이가 태어나면 이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하나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회에서 평생 천덕꾸러기로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녀가 이 아이들을 죽여 가루로만든다는 것인데 마녀가 만든 가루는 ‘마녀연고‘라고 불렸으며 사람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이는 용도로 쓰인다고 믿었다.
1598년 7월 11일, 프랑스 베통쿠르Betoncourt 출신인 앙티드 Antidecolas 라는 여자가 외과의사인 니콜라우스 Nicolas Milliere에게 검진을 받는 도중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의 배꼽 밑에 또 하나의 여성 생식기가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제자리에 있는 정상적인성기는 남편과 성교할 때에 사용하고 마귀와 성관계를 할 때는 배꼽 밑에 있는 생식기를 사용한다고 고백했다. 사람들은 마녀재판을 열어 그녀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의사의 진단을받게 했는데 그 사이에 그녀의 두 번째 생식기가 닫히고 흉터만남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두 번째 생식기가 사라졌지만 1599년 2월 20일, 그녀는 마녀로 몰려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 P55

1750년 8월 16일자 포시쉐 자이퉁Vossische Zeitung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독일 중동부의 할레Halle에서 약간 떨어진 마을에 사는어느 농부의 아내가 마귀와 성관계를 맺어 임신을 한 혐의로 불에 태워져 죽임을 당했다. 그녀가 낳을 아기가 마귀의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은 그녀의 몸을 해부해보니 몸안에 커다란 혹이 들어 있었다. 그 혹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뱃속을 굴러다녀서 임신으로 착각한 것이다. 오늘날의 진단으로는 분명 종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평범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모든 것이 마법이고 마녀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 P58

그는 『차가운 물을 통한 마녀시험과 심문에 관하여Von Enhwanaging th Pro the auternmen durchskate waser 라는 저서에서 마녀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으로 ‘물 시험‘이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물 시험 중첫 번째는 마녀로 의심받는 사람을 물에 빠뜨려 마녀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물은 고대부터 신성한 것으로 여겼기에, 그신성함이 마녀를 구분해 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었다.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의 손과 발을 묶어 깊은 물속에 던진 뒤가라앉으면 죄가 없으니 다시 건져서 살려주겠다는 이 시험은 사실 구실에 불과했다. 건지기도 전에 익사한 사람이 대부분이었기때문이다. 반대로 물에 뜨면 마녀라고 의심하였다. 마귀가 도와주어서 가라앉지 않고 물에 뜰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두 번째는 뜨거운 물로 하는 시험이다. 이것은 찬물 시험보다더 오래된 방법이다. 마녀로 의심받은 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맨손으로 끓는 물속에 들어 있는 작대기나 돌을 꺼내야 한다. 그후 손에 붕대를 감아두었다가 며칠 후 풀었을 때에 상처가 곪지않았다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판별했다. 신의 도움으로 상처가 곪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상처가 곪아 터진 경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마녀로 몰렸다. - P64

예수회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프리드리히 슈페(Friedrich Spee,
1591~1635)는 사회 전체가 마녀사냥 때문에 어지러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켰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마녀재판과 고문을 반대하는내용을 담은 『재판관에 대한 경고Cautino Criminails』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재판과정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했다가 수 - P68

도원 안의 동료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독일 파다본Paderborn의주교 펠킹(Johannes Pelking, 1573~1642)은 이 책을 ‘신을 모독하는불경한 저서‘라로 간주했지만 그의 책 덕분에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의 광기가 차츰 누그러질 수 있었다. 만약 그의 책이 출간되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며 후세의 학자들은 그의 행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책의 출간 과정에 관한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자신이다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는 이 책을 익명으로 출간하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용기 있게 자신이 이 책을 썼노라고 이름을 밝혔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내세워 책을 출간하였다면 이 책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전에 그 역시 마녀로 몰려 마녀재판에 넘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가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동기는, 그가 사제로서 직접 경험하고 체험한 일들 때문이었다. 그는 마녀재판에 끌려가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영적 지도신부로 동행한 적이 많았고, 마녀사냥으로 고통 받는 민중을 꼼꼼하게 살펴볼 기회도 있었다. 날씨 변동이나 흉년 등 자연재해로사람들이 굶어 죽어도 마녀의 짓으로 돌리는 세상의 여론이 못마땅했고 종교 분파가 생겼을 때에는 이것 또한 마귀의 저주로 여기는 교회 사람들이 그에게는 온전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제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가 쓴 책의 내용처럼, 마녀재판은 억울한 사람에게 죄를 덤터기 씌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희생자의 약 - P69

팔십 퍼센트는 여자였고 그들 중 대부분은 과부와 가난한 사람,
또한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웃이 이웃을 고발하는 등 밀고가 점점 심해지자 그는 억울한 마녀사냥을 막기 위해마녀재판 자료를 찾아 연구하였고, 마녀로 몰린 사람을 심문할 때나 재판할 때에 함께 참여하거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자료를 모았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일수록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것을 통감했다.
또한 마녀재판관들이 혐의자를 고문할 때는 이미 시나리오를 짜놓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목적에 합당한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하여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가 밝힌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진짜 마녀가 아니라 그냥술을 많이 마신다는 이유로 혹은 이웃의 시기나 질투, 복수나 해코지의 목적으로 밀고를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억울하게밀고 당한 이가 처참하게 불에 타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신학자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만들어 낸가상의 인물이 마녀이고 마녀사냥이다. 이들은 이 가상의 인물이실제로 있다고 믿고 의심되는 사람을 잡아다 심한 고문을 하느라정작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에게 관용을베푸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도 경계선은 있다.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을 풀어주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행해지는 고문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자비하니 그것을 막자는 주장이다. 죄 없는 자들도 - P70

분명 있을 것이고 잘못된 심문도 분명 많을 터인데, 사람으로서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동반하여 심문한다면 그 고통을 참지 못해허위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법 앞에서 무죄 고백을 할 기회가 없는 힘없는 사람들을 기득권의 심판에 따라 가차없이 죽이는 제도를 바꾸자는 것이 그가 주장한 내용의 핵심이다.
그의 책은 제후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의 여왕 크리스티나(Alexandra Christina, 1626~1689)는 1649년 마녀사냥을 금지하라고 명하는 동시에 그 당시 진행 중인 모든 마녀재판을 중지하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마녀로 몰려 잡힌 이도 모두 풀어 주었다. 1740년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도 마녀재판에서 고문을 금지하는 한편, 아직 많은 여성이 억울하게 마녀라는덫에 걸려있다며 이들을 풀어주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조처했다. 한 스페인 신부가 저술한 책이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마녀사냥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슈페 신부의 말년은안타깝게도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한 후 동료와 교회 수장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고 불리한 조건의 근무지로 이동을 지시받았다. 그가 마인츠에 근무할 때 페스트가 발병했는데,
그는 가난한 병자들을 돌보다 페스트에 전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 P71

『재판관에 대한 경고』에서 그가 주장한51가지 중 몇 가지를 요약해 본다.

*물론 진짜 마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바로는 그들은 전부 마녀가 아니었다. 마녀로 몰려 잡혀 온 자 중 진짜 마녀와마녀가 아닌 사람을 신중하게 관찰하여 구별해야만 한다.
* 진짜 마녀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을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은 마녀 행위보다도 더 악의적이고 음흉하다.
* 마녀를 고문하는 기구는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잘못된 것이다. 이런기구를 사용하는 것은 전쟁보다 더 심각하게 민중을 초토화시킨다. 절대로 그런 방법으로 사람을 심문하고 고문해서는 안 된다.
* 밀고나 고발이 들어왔을 때에 무조건 그 말만 믿고 혐의자를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 반드시 신중하게 사실 여부를 점검해야만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시기와 질투에 의한 밀고로 잡혀 온 사람들도 있다. 억울하게잡혀 온 것도 문제지만, 이들이 받는 심문과 고문 역시 지나치게 무섭다.
"재판관은 이유 없이 타인을 비방하는 자들에게도 엄중한 조처를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죄 없는 자가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재판관 중 많은 사람이 뻔뻔하고 교만하며 물욕이 넘치고 무지하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단지 하나, 인간이 흘리는 피다. 마녀재판은 단지지식만 갖고 있는 학자들이 하면 안 된다. 인간적인 기본 소양을 갖춘 현명한 사람들이 재판해야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다.
* 마녀사냥에서 혐의자의 재산은 압수해서는 안 된다. 이런 몰염치한 일은 즉각 중단해야만 한다.
고발당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변호인을 붙여 주어야 하고, 고문을 통해강제자백을 받아내는 일은 중단해야 한다.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면 고통스러운 나머지 죄가 없어도 억지 자백을 하기 마련이다.
* 마녀재판에서 행해지는 무시무시한 고문은 신 앞에 그리고 모든 정의 앞에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재판관과 사형집행인은 순전히 그들이 원하는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한다. 붙들려온 사람 중에는 죄 없는사람도 있을 터인데, 이들의 억울한 인생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 고문은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이다. 생각해보라. 인간이 인간을 고문한다는 것은 인간의 진정성을 상실한 것이다.
* 감방에 있는 사람들을 고문하기 전에, 그들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범죄이자 악습이다.
* 진정 고문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올바른 전문가를 동원해 마녀인지 아닌지 판단한 다음 고문하도록 하라. - P72

식민지에서 자행된 마녀사냥

유럽 바깥의 식민지에서 마녀사냥이 자행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찾을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새로운 유토피아라 불리는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탐험가가 많았다. 새로운 부를 축적하겠다는욕심으로 신대륙을 찾아 나선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는 당시 마녀사냥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언젠가 자신도 마녀 혐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유럽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도다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신대륙에서 자국의 마녀사냥과 유사한 방법으로 마녀재판과 고문 - P86

을 행하며 본토인들을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었다. 유럽 내에서는마녀사냥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또 다른 마녀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이들을 비판했던 성서 구절은 마태오복음 23장 15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물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을 떠나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이 약 500만 명 정도에 이르는데, 이들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에서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16~17세기에 넘치는 힘을 자랑하던 스페인은 이 시기에 많은식민지를 확보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했다.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필리핀, 북아프리카, 지중해 등으로 식민지를 개척한스페인은 15세기 초부터 자국에서 하던 마녀사냥을 식민지로 옮겨 그 악랄함을 이어 갔다. 자국에서도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와약간만 다르게 행동해도 마녀로 몰았는데, 자신들이 정복한 곳의본토인들이 믿었던 전통종교에 대해서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이들은 본토인의 전통종교는 철저하게 미신으로 규정했고이를 믿는 본토인들을 ‘마귀 추종자 Teutels Anhaenger‘라고 부르며 무시무시하게 탄압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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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되도록이면 가장 모험적방식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구상하라고 자극받는다. 혼자서 세계를 정복하는 일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낭만적 운명이다. 그런 상상 한 켠에는 한 여성이 나타나 발목을 잡는 바람에 모든 걸 망치는 그림이 될까 봐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세계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길을 터 나가는 미래의 그림은, 그 속에남성이 없는 한 오랫동안 슬프고 초라한 것으로 채색된다. 이처럼 편협한관습을 넘어 다른 세상을 꿈꾼다는 건정말 대단한 일이다."

"인간의 자질 대부분이 ‘남성적인것’으로 분류되고 그중 몇몇만이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인생이 걸린 중대한 문제를다른 존재에 투사하고 싶어 하는 욕구를 훨씬 더 많이 갖게 된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칙서로 고양이를 ‘악마의 하수인‘이라고선포한 바 있다. 이어서 1484년 교황이노센트 8세는 여성의 동반자로 보이는 모든 고양이를 사마로 간주하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마녀들’은 자신의 동물과 함께 불에 타죽어야 했다.
이런 고양이 몰살은 쥐 개체군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고, 따라서 전염병인페스트를 더 악화시켰다. 이런 이유로마녀들은 처벌을 받았다.

그 조잡성은 미디어의 존재 이유가 대체로 정보 전달이 아니라이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즉 어떠한 비판적 시각도 없이 되풀이되는 편향된 연구, 양심의 가책과엄격성의 전반적 부재, 지적 게으름,
기회주의, 선정주의, 부화뇌동, 그 어떤 현실과도 관계가 끊긴 폐쇄회로에갇혀 있는 것 같은 상태…, 팔루디는
"이런 유형의 저널리즘은 실사를 기반으로 신빙성을 얻는 게 아니라 반복에서 그 힘을 끌어낸다"고 지적한다. 이시기 모든 매체를 동원해서 만들어낸가설을 두 가지 거짓말로 요약할 수있다.첫째,페미니스트들은 승리했고, 평등을 획득했다. 둘째, 지금 그녀들은 혼자이고 불행하다.

두 번째 주장은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겁을 주고 경고를 던지는 데 목적이 있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도움을주는 자리에 남아 있지 않고 자신을위해 살려고 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여성은 불행을 겪으며 고전한다는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고자 그녀들의약점이 되는 부분, 즉 자기 자신과 맞대면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갑작스럽고 강렬한 두려움을 곧장 조준한다.

그리고 그녀가 염색 작업장에서 일한 첫해 생산량이 눈에 띄게 향상된다. 그런데 여성 근로자들은 남성 동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녀들은 "한 여성을 죽여 남성 근로자 하나를 구하라"고 적힌 전단지를 보게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듯 베티 리그스의 남편은주차장에 있는 그녀의 자동차에 불을지르고 몰래 작업장에 침입해 그녀를구타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공장을 상대로 소송을 걸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연방정부 판사가 그녀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5 베티 리그스는 ‘여성의 일‘로 돌아가지 않을 수없었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화형대는 없었지만반항하는 자들이 영원히 하류층에 머물게 하기 위해 신체를 손상하고 때리고 배제하는 가부장제의 권력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베긴 공동체의 몇몇 여성은 공동체밖에서 일하고 거주했으며 잔느 뒤 포같은 이는 번창하는 비단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다른 수녀원에 갇힌 몇천명 여성들이 노쇠를 면치 못하는것과는 반대로 베긴의 여성들은 신체적·지적·영적 왕성함을 누렸다. 19세기 시인 테오필 고티에 [예술지상주의로유명한 프랑스 시인이자 비평가(1811~1872)〕는 딸을 자비의 성모자매회 수도원에 맡겼다. 어느 날 수도원을 방문한 그는 딸에게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리고 딸이 일주

그녀는 또 결혼으로 얻은 존경할만한 것들, 예를 들면 고분고분함, 순종 같은 덕목만이 염소로 변하지 않고리본을 자를 수 있게 해주었다고 강조한다.
유럽에서 마녀재판의 거대한 물결이 일기 전인 15세기, 일종의 예고처럼 베긴Béguines 공동체 여성들이 누리던 특별한 사회적 신분을 파괴하는일이 벌어졌다. 이 여성 공동체는 특히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지에 있었다. 공동체에 속한 여성들은 대체로기혼 여성도, 수녀도 아닌 미망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든 남성 권력에서벗어나 정원이 딸린 작은 개인 주택에서 함께 살았다. 정원에선 채소와 약용작물을 키웠고, 자유롭게 이 채소밭

는 모델에 따라 좋아하는 남성, 남자친구, 고용주나 배우자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면서 대리자로서의 소명을 실현하는 쪽을 택한다. 어디선가본 티셔츠에 적힌 다음과 같은 여성주의 슬로건이 겨냥하고 깨트리려 한 건바로 여성의 자기 억압이다.
"너의 부모님이 늘 너와 결혼하기를 바라는 바로 그 의사가 되어라".
학문의 역사와 예술사에도 당연히동반자 여성의 작업을 가로챈 남성들이 가득하다. 예를 들어 스콧 피츠제럴드는 아내 젤다가 쓴 글을 자신의책에 끼워 넣었다. 그래서 그녀가 글모음집을 출간하려 하자 제목을 ‘작가의 아내로 하라고 은근히 권했다.
그리고 책에는 조력자나 이인자 위치

에리카 종의 여주인공 이사도라 윙은 어머니에게서 예술가나 예술가 지망생이 되지 말라는 주의를 듣는다.
어머니는 이 교훈을 얻기까지 아주 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딸은 말한다.
"할아버지는 자주 내 어머니의 그림 위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곤 했어.
어머니는 새 캔버스를 사러 가는 대신그런 할아버지를 피하기로 하고 한동안 시 창작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러다 내 아버지를 만났지. 아버지도 노

랫말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어머니의시적 이미지를 훔쳐 자신의 노래에 써먹었어."
이사도라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글을 쓰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다"는 말에서볼 수 있듯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진정성 있는 바람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못할 정도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한다.
에리카 종의 초기 두 소설의 초고에서는 화자가 남성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한 여성의 의견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리란 단순한가정에서 출발했다."
그녀가 잘 아는 모든 주제는 죄다그녀에게 ‘평범‘하고 ‘너무 여성적’인

듯했다. 게다가 그녀는 주변의 따뜻한격려를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다. 아이를 아홉이나 낳은 그녀의 언니는 그녀가 쓴 시를 ‘자위적’이고 ‘노출광적‘이라 평하면서 그녀의 ‘불임‘을 비난한다.
"너는 글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인생을 사는구나!"
2013년 《비행공포》 출간 40주년기념 후기에서 에리카 종은 열 개 남짓 되는 언어로 2,700만 부를 판매하고 영화화를 준비하는 중인데도 여전히 "자신은 소설을 쓰는 나쁜 버릇을가진 시인"으로 느껴진다고 털어놓았다.

당신이 희생을 거부하거나 당신 자신의 목표를 좇고자 하면 즉각 비난을부른다. 그 거절이 직장 내에서 일어났다면 당신은 건방지고 개인주의적이며, 출세주의자, 거만한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당신의 편협한 자아를넘어서는 대의를 위해 도와주는 행위의 아름다움과 그 행동이 안겨줄 고결한 보람을 찬양하는 남성 한 무더기와마주할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정작이렇게 남을 도운 적이 없을뿐더러 보람을 느낀다는 것 또한 남들에게 들었을 뿐이다.

한 자기중심적이라는 유감스런 태도73에 모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특효를 예찬하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어느 젊은 미국 여성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던 여성이 태도를 싹 바꾸게 되는 계기는 오직 아이를 갖는 것"
이라고 표명한다. 그러고 나서 듣는말은 "아무도 당신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처럼 피임과 낙태의 권리는 ‘좋은’ 어머니가 되는 규범들을 강화하는 역효과만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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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부정적 이미지들을 비판적 관점에서 검토하려는 성실한 의지를 널리 공유한다 해도 우리로서는 이이미지를 대체할 여성의 다른 이미지를 과거에서 찾을 수 없다. 프랑수아즈 도본이 적고 있듯이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그 기억마저 사라져버릴 사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들의 모습은 지금과는 달랐을 테고, 어쩌면 사고하는 방식도 달랐으리란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나는 이 역사의 네 가지 측면에 집중하고 싶다. 먼저 모든 여성 독립의 의지를 꺾으려는 공격이 있다(1장). 마법으로 고발당한 여성들 가운데 독신녀와 미망인, 다시 말해 한 남성에 종속되지 않은 모든 여성은 불필요한 설명들을 덧붙여 부각시킨다. 당시 여성들은 일터에서 차지한 자리에서 쫓겨났고 동직 조합에서 제명당했다. 말하자면 직업 교육을 받는 것은 합법적인일이었지만 실제 노동 세계에 진출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혼자사는 여성은 누구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경제적 압박"0을 받았다. 독일에서 명장들의 미망인들은 남편이 죽고나면 함께하던 일도 그만두어야 했다.
법적으로 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가정과 국가의 올바른 관리는 모두 남성의 지배를 받을 때 안전하고 이 둘은 서로를 보강한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그가 마녀들에 대해보이는 집착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프랑스에서는 1804년 민법전에서 공식적으로 기혼 여성의 사회적 능력 상실을 인정한다. 이렇게 마녀사냥은 제임무를 마친다. 즉 법이 "모든 여성의자립을 법적으로 막으니 이른바 마녀라 칭하는 여성을 화형하는 일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앞으로는 적어도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현대 마법은매우 드물게 언급될 것이다. 그보다나의 관심사는 여기서 대강의 줄기만말했던 역사를 기반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후예를 탐색하는 데 있다. 마녀사냥은 여성에 대한 편견과 일부 여성이 겪었던 치욕을드러냈고 또한 이를 증폭시켰다. 마녀사냥은 일부 여성의 행동과 존재방식을 억압했으며, 우리는 수세기에 걸쳐계승되고 벼리어진 그 표현들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여성에 대한 이 부정적 이미지들은 최선의 경우 검열이나 자기검열, 장애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최악의 경우 혐오감을 일으키

마녀사냥은 또한 늙은 여성에 대해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의식 깊숙이각인시켰다(3장). 물론 젊은 ‘마녀들’도 모두 화형을 당했다. 심지어 소년 소녀들, 예닐곱 살 먹은 어린아이들도 모두. 외모가 혐오스러운 데다축적된 경험 때문에 특히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던 나이 많은 노파들은 마녀사냥이 "선호하는 사냥의 희생자들"
이 되었다. "고령의 노인은 마땅히 누려야 할 애정과 돌봄을 받기는커녕 마법으로 고발당하는 일이 너무 흔했던나머지 이 시기 북유럽에서는 늙은 여성이 자기 침대에 누워 죽는 걸 매우

벨기에 캥탱 마시, 독일 한스 발둥,
스위스 니클라우스 마누엘 도이치 등의 화가들, 롱사르, 뒤 벨레 등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늙은 여성에 대한 집요한 증오심은 당시 확산되던 청춘 숭배 분위기와 더불어 여성들의 장수로설명할 수 있다.

확립과 동일한 시기에 일어났다. 이때여성에 대한 무시를 자양분 삼는 거만한 학문이 생겨난다. 여성은 비합리,
감정, 히스테리, 지배해야 하는 자연과 연결된다(4장). 특히 현대 의학은이러한 전형을 기반으로 구축되었으며, 마녀사냥과 직접적 관계가 있다.
마녀사냥은 당시의 정식 의사들이 대체로 그들보다 훨씬 유능한 여성 치료사들과의 경쟁을 면하게 해주었다. 현대 의학은 환자와 구조적으로 공격적관계를 맺는 것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리고 사회연결망 덕분에 몇 년전부터 점점 증가 추세인 학대와 폭력에 대한 고발이 증언하듯이 현대 의학은 여성 환자에게 더욱더 공격적이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할 때가 잦은

해 보조금이네, 대여금이네, 세금 삭감이네 등등 하며 오랜 세월 동안 ‘국가-배우자‘의 도움을 받아왔으면서비혼 여성이 실제로 ‘국가-남편‘의 도움을 요구했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분노할 만한 일이냐고 지적한다.
여성이 진정으로 주권을 가진 개인이지 단순한 부속품이나 짐수레 말을기다리는 연결 부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사람들 머릿속에 파고들게 하기는쉽지 않다. 보수 정치가들만 그런 게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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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사랑해 주지 않아요."
"그렇다면 남편에게 불만이 많겠군요? 그리고 남편이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화가 나고요."
여자는 대답 대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마법을 썼군요? 약초로 약을 만들거나 동물 뼈를 침대에 넣어 두거나 하지 않았나요?"
"그런 일은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건 말할 수 없어요."
크라머의 눈빛이 다시 빛났다. 크라머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리는 신과 함께하는 자리예요. 나는 그 신의 대리인이죠. 부인의 잘못은 신이 용서해 주실 거예요."
여자는 재판장과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이 자리는 고해성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저기 피고는 마법을 사용했다는 혐의로 고발된 것이지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해고발된 것이 아닙니다." - P49

"아마도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었겠지요. 그런 만큼 남편이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죽도록 미웠겠지요.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죽이고싶었을 거예요. 저주를 퍼붓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사탄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겁니다. 사탄은 늘 그런 사람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사탄은 부인의마음을 달래 주고 부인의 욕망을 채워 주었겠지요. 사탄은 부드러운 말로 부인을 꾀었을 겁니다. 아마 부인은 그것이 사탄인지도 몰랐을 거예요. 어쩌면 꿈에 멋진 남자로 변신해서 나타났을지도 모르지요."
크라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크라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탄은, 아니 사탄의 꼬임에 넘어간 부인은 남편에게 꼬리를친 여자에게 저주의 마법을 걸었고, 그래서 그 여자가 죽은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 여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 여자가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내가 죽이지않았어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여자는 소리를 쳤다.
"잘 알고 있습니다. 부인은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저주의 마법을 걸었고, 그래서죽은 거예요. 부인 잘못이 아니에요. 마음속의 사탄이 나쁜 거지요." - P50

「마녀의 망치』는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악명 높은 책이었다. 제목에 망치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주술을 망치로 내리쳐 부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마녀사냥의 불길이 가장 거세게 타오른시기는 1480~1520년과 1580~1670년이었다. 1487년에 출간된 『마녀의망치』는 마녀사냥 초기에 그 기준과 방향을 정하는 데 기여했고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마녀의 망치는 마녀사냥의 지침서로널리 활용되었다.
마녀사냥이 가장 혐오스럽고 악독한 범죄가 된 것은 마녀의 망치』가 제시한 기준 때문이었다. 그에 따르면 마녀로 지목되는 것은 소문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다음엔 죽음이 은총이라고 여길 만큼 혹독한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면 그걸로 끝이었다.
마녀재판을 담당한 사법관은 어떤 사람이 석연치 않게 죽거나 질병과사고가 생기면 곧바로 조사에 착수해서 누군가를 마녀나 마법사로 지목했다. 이들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는 미성년자나 아이들의 증언도 개의치 않고 채택했다. 올가미에 걸린 동물이 그렇듯이 마녀나 마법사로 한번 걸려들면 빠져나갈 수 없었다. 사법관들의 목적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추측과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마녀를 찾아냈다. 추측의 근거는 ‘마녀의 망치였고, 그 뒤에는 제멋대로 끌어들인 신의 이름이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었다.
마녀를 찾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발에 무거운 돌을 달고 물이나 늪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물 위에 떠오르면 악마의 힘이 작용했다고 믿었고 물에 빠져 죽으면 무죄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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