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나‘에 대한 정보를 담을 그릇도 나뿐이고요. 그걸 나눠 담을 애인도 아이도 없으니. 내 작품을 재출간하겠다는 니나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지 몰라요."

Untitled Memoir Veronica Vo

"나를 위해 새로운 작품을 쓰고 싶기도 했고요. 나를 위한 나의 선물. 어쨌든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 P219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여기서 안정감을 느꼈다. 울프가 『등대로』에서 말한 ‘일상의 작은 기적‘ 중하나가 내 집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에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돈을 보내라고. 가족들을 데려가면 더 좋다고. 나는 무슨 수로 그럴 수 있을지 모르면서 알겠다고 했어요. 취직이 되자마자 정말 돈을 보냈고 지금도 보내는 중이에요. 근데 다른 사람들은 죽거나 이사가거나 연락이 끊겼고 여기 이렇게 나 혼자 남았네요."

"엄마는 내가 이런 삶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 충격받았을 것이다. 그 먼 길을 건너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하며 그토록 많은 원고를 쓴 이유가 나 혼자살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에."

"그 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마지막사진을 찍었다." - P2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규칙과 명령들이 만들어주는 영향력만큼 허망한 게 있을까.
그런 식의 만족감이란 겨울의 빈 새둥지처럼 허망하고 쓸쓸하지 않나. 사람들에게는, 진심을 주지 않음으로써 누군가를 결국 무력화하는 힘이 있는데 어떤 부류들은 그런진실에는 무관심하곤 했다. - P1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근 첫날 시린은 뭔지 모를 워크플로우 그래프가 그려진 큼지막한 바인더와, 정치학 담당 어시가 말하길 "황당한 줄임말로 작성된 가슴 절절한 작품"이라는 200MB 크기의 PDF 파일을 받았다. TCRF(제목 변경 요청서), CIG(교열・색인 가이드라인)처럼 많이 쓰이는 300여 개의 줄임말을 설명하는 약칭 정리 파일이었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려서 서울로 갔을 때 나는 봄이 되자 곤혹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나를 둘러싼 물의 세계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였다. 맡게 되는 물 냄새가 너무도 달랐다. 주방의 수돗물 냄새, 골목 하수도의 구정물 냄새, 지붕 홈통에 고인 빗물 냄새, 마당 수돗가에 푸릇한 이끼들과 함께 고여 있는 잔물 냄새, 그리고 가장 예민하게는 한강의 냄새가. - P74

그 당시 전철 차창은 아래위로 나뉘어 위쪽을 열 수 있었는데, 3호선을 타고 철교를 건너며 맡는 강물 냄새에는 바다 내음에서 나던 알싸한 상승감 같은 것이 없었다. 그건 어쩐지 콧속을 너무 보드랍게 문질렀다. - P75

하기는 강화에 있었다면 지금까지 코트를 입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추웠고 그건 몸을덥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안정적으로 눌러줄 얼마간의 무게가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건누군가 놓친 유원지 풍선처럼 날아가버려도 그만일 테니까. 대문 밖만 나가면 아는 얼굴들이 나타나는 섬과, 사람 물살을 헤치고 다닐 때마다 생소한 얼굴들이 차고 슬프게 다가왔다 사라지는 이곳의 봄은 완전히 다른 계절이었다. - P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까는 감사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절 위해 비명을 질러준 건 처음이에요." - P259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라고, 이마치는 생각했다.
누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고, 이 잔을 비우고 나면,
그녀도 넘어갈 거라고. - P262

왜 자신을 그토록 도와주려 하는가 묻자, 노파는 뒤늦게 이마치의 팬임을 고백했다. 그녀의 작품들, 그녀가 연기한 사람들로부터 매 순간 위로받았다고. 이마치는 볼이 붉어지는것을 느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그 말에는 면역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을 믿었다. 아름답다거나 명석하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지만 연기가 좋았다는 말은 믿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 P264

가끔 내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얼마나 많은 오렌지를 먹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곳에 가봤을지. 나는 어린 나이에 죽어서 그 모든 기회를 잃어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드문 일도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제 와서 그 일이 누구 책임인지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 나는 그 일을 멀리서 바라본다. 죽음이란 삼인칭이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이 삼인칭으로 산화함을 아는 것이다. - P272

남자는 그들에게 이야기해준다. 이마치의 길고 긴 필모그래피에 대해서. 그녀는 인물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연기하는 배우였다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이 속절없이 이끌렸다고, 그런 식의 연기를 하는 사람은 전으로도 후로도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오래된 필름에 관심이 없다. - P280

나는 이마치에게 폭풍우의 잔재가파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한때 바다를 잘게 부수어 집어삼퀸 에너지가 물결이 되어 끝없이 흘러오는 거라고.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 P282

눈물, 이별의 말들, 지루한 기도문. 그리고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파동이 느껴진다. 대양을 항해하고 도달한 유려한 곡선의 물결. 우리는 그것을 잡아탈 준비를 한다. 이마치가 앞서가고 내가 뒤따라간다. 우리 자신이 파도 같다는 말에 이마치가 슬쩍 뒤돌아보며 웃는다. 그녀는 더이상 비밀이 없고,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서 날아오른다. 무한한 파도, 영원한 파도, 그녀 자신의 파도 속으로. -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