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는 의외로 커피의 나라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국의 커피 퀄리티에 항상 자부심을 느끼곤 했다. 핀란드의 원두 소비량이 세계 1위라는 이야기는 핀란드 친구들과 커피를 마실 때면 늘 듣는 이야기였다. 위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1년 중 추운 날이 워낙 긴 데다 그중 절반은 해가 뜨지 않는 극야가 지속되니까 더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심지어 ‘못 견딜 정도로 절박하게 커피를 원하는 상태‘를 뜻하는 ‘kahvihammasta kolottaa‘라는 핀란드어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좁은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밤을 지새운 우리는 그야말로 몹시 ‘kahvihammasta kolottaa‘ 한 상태였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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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은 아차 싶었다.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상처를 받고 위험을 피하려는 승주의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싫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승주에게 다른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 P195

"그 왜 있잖아, 로맨스 영화 보면 주인공이 연인과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조연. 그게 내 팔자는 아닌 건가 싶어." 도덕이나 약속으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덮치는 일. 연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와 같은 일이 삶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게 승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안이었다. - P224

도담은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해솔에게 느끼는 감정, 승주에게는 한 번도 느끼지 않았던 강렬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 P226

"불에 휩싸인 네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꼭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처럼 느껴졌어. 구조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도담은 해솔을 끌어안고 등을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해솔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마음과 그 고통을 생각하자 가시 돋친 넝쿨을 끌어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지 마."
해솔이 사명감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도담은 알 수 있었다.
몸에 상처를 내고 술에 의존해 지냈던 도담은 자신을 벌하려는 마음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누구도 모르는 해솔의 비밀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도담만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옳다고 하는, 생명을 위한 희생이라는 가치 안에서만 자기파괴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해솔이다웠다.
도담의 말을 듣고 해솔은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듯 했다. 아무도 모르는 죄책감을 오래 품고 지낸 그는 자기 삶을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고 여겼다. 열 명의 목숨을 구하고 백 명의 목숨을 구하면 그 값을 치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 쓰여야 한다는 듯 위태롭게 뛰어들었던 것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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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랑해라고 하는 말이 이젠 미안해라고 들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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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번이 릴라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것이다. 그날 이후로 릴라는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만큼 이야기를 쓰는데 필요한 자료도 빈약해졌다. 그만큼 우리 둘의 삶이 전혀 다른방향으로 전개되어 서로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도시에 살게 되어 서로 거의 만나지 못하는 동안 언제나 그랬듯이 릴라는 좀처럼 내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릴라의 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그렇지만 릴라의 그림자는 멀리서 나를 자극하기도 했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부심을 한층 고취시켰다가 어느 순간 위축시키기도 하면서 나를 도무지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자극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금 이 순간 릴라가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릴라가 내 글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덧붙이기를 원한다. 릴라가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에 그녀의 지식과 말과 생각을 덧붙여 우리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 파시스트가 된 지노와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 나디아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 오래전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가에 있는 갈리아니 선생님댁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 자신의 성경험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봤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그날 저녁 릴라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민망함과 아픔, 내가 릴라에게 해준 얼마 되지 않는 몇 마디 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봐야겠다. - P135

「푸른 요정』이 공장 마당의 모닥불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공기속에 흩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릴라는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만남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릴라는 며칠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그 이유를 알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아봤자 상처만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으로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자신의 불행이 일반적인 불쾌함이 되고 그러다 가벼운 우울함이 되고 그마저도 일상의 고달픔으로 희석될 때까지 기다렸다. - P136

"어떤 공부를 했죠?"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았어요."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까 고함 소리도그렇고요."
"사실인 걸요.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예요."
"왜죠?"
"공부를 계속할 만한 재능이 없었으니까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재능이 있는 건 엘레나였어요, 제가 아니라."
갈리아니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공부를 계속했다면 엘레나만큼 잘했을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내 직업인걸요."
"선생님들은 그걸로 먹고사니까 공부가 중요하다고 하죠. 하지만실은 공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공부한다고 사람이 더 나아지지도 않고요. 오히려 더 못돼질 뿐이죠."
"엘레나가 못되게 변했다는 뜻인가요?"
"아뇨, 엘레나는 아니에요."
"왜죠?"
릴라는 젠나로의 머리에 울 모자를 씌웠다.
"어린 시절 둘이 약속했거든요. 둘 중 못된 역할은 제가 맡기로요"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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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은 혀를 통해 입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의식을 붙들어 매고 돌이킬 수 없는 힘을 가진다. - P59

"시련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교회에 다니는 할머니는 밤마다 해솔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해솔은 이유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할머니는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하나님은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준다고, 믿기만 하면 죄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렇게 대단한 하나님이 조건부 용서라니. 정말이지 속 좁고 쪼잔한 거래 아닌가. 그렇게 쉽게 용서받을 리 없었다. 신이 용서한다고 해도, 해솔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였다. - P77

그들과 비슷한 나이인 태준은 남들처럼 추억을 만들고 웃고 즐기는연애를 바랄 뿐이었다.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 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 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 P99

도담은 다짐했다. 외롭지 않아야 한다. 외로우면 약해지고 쉽게 빠질 수 있다. 주변에 사람을 두고 혼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얄팍하더라도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 - P99

일단 도담이 자신을 망가뜨리려 하자 그 일을 도와줄 사람들은 넘쳐났다. 상처 입은 사람의 냄새는 애써 덮고 감추어도 눈빛에서, 걸음걸이에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도담이 외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남자들은 어디선가 나타나 접근했다. 시체를 뜯어 먹으려고 강바닥에 숨어있다 모여드는 다슬기처럼. 도담은 그들과 술을 마셨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누군가에게 쉽게 빠졌고 쉽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도담은 고백해 오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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