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담은 아차 싶었다.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 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상처를 받고 위험을 피하려는 승주의 모습이 나와 비슷해서 싫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승주에게 다른 뭔가를 기대했던 걸까. - P195
"그 왜 있잖아, 로맨스 영화 보면 주인공이 연인과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조연. 그게 내 팔자는 아닌 건가 싶어." 도덕이나 약속으로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덮치는 일. 연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그와 같은 일이 삶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게 승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불안이었다. - P224
도담은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해솔에게 느끼는 감정, 승주에게는 한 번도 느끼지 않았던 강렬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 P226
"불에 휩싸인 네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꼭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처럼 느껴졌어. 구조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도담은 해솔을 끌어안고 등을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해솔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마음과 그 고통을 생각하자 가시 돋친 넝쿨을 끌어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러지 마." 해솔이 사명감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도담은 알 수 있었다. 몸에 상처를 내고 술에 의존해 지냈던 도담은 자신을 벌하려는 마음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 누구도 모르는 해솔의 비밀을 세상에서 유일하게 도담만은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옳다고 하는, 생명을 위한 희생이라는 가치 안에서만 자기파괴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해솔이다웠다. 도담의 말을 듣고 해솔은 자기도 몰랐던 자신의 상태를 알게 된 듯 했다. 아무도 모르는 죄책감을 오래 품고 지낸 그는 자기 삶을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고 여겼다. 열 명의 목숨을 구하고 백 명의 목숨을 구하면 그 값을 치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 쓰여야 한다는 듯 위태롭게 뛰어들었던 것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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