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이에요, 정확히?" 그녀가 물었다.
"서른넷." 그가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되나?"
그가 그녀 옆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됐어. 당신한테 이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서." 그가 몸을 돌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민달팽이가 되어 그가 소금을 부어대는 바람에 그의 입맞춤으로 흐물흐물 해체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 P49

그녀는 스물네 시간 동안 잤다. 그러고는 일어나 식당에 가서 와플을 먹었고 넷플릭스에서 탐정물을 몰아서보았으며 그녀가 뭔가 하지 않아도 그가 사라져버릴 희망적인 가능성, 어떻게든 그가 사라지기를 바랄 수 있는희망적인 가능성을 그려보려 애썼다.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 그에게서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고 내용은 레드바인스에 관한 악의 없는 농담이었다. 그 어떤 일을 놓고 봐도 너무 지나친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살갗에 뭔가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혐오감이 밀려와 바로 메시지를지워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적어도 이별 통보 메시지 정도는 보내줘야 한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적절하지않으며 유치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또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경우 그가 알아차릴 때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자메시지가오고 또 올 것이며 아마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 P49

다음 날이 지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자꾸 뭔가를 그리워하며 회색의 몽롱한 기분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이 로버트라는 것을, 실재하는 로버트가 아니라 휴가 기간 동안 주고받은 그 모든 문자메시지의 저편에 있다고 상상했던 그 로버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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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 그다음엔 밀쳐졌을 때 오는 충격과도 비슷한 통증. 창틀에 손을 올린 소년이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짧은 부츠를 신은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을때, 그의 작고 뾰족한 부츠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들더니 무심하게 걷어쳤다. - P15

심하게 걷어찼다. 그 통증이라면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1학년 때의 나에게 통증이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내 살속에 익숙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따금 생각났다는듯이저릿저릿할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넘어지기만 해도 자연히 눈물이 나던 네 살 때처럼 아팠다. 하나의 통점으로부터 쫙 퍼지듯이 육체가 감각을 되찾았고, 조악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으로 세상이 선명해졌다. 초록색의 자그마한 몸이 여자아이가 누운 침대로 팔랑팔랑달려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흔든다. 얘, 하는 사랑스럽고 맑은 목소리가 꿰뚫고 지나가자 피터 팬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 그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닌 그 남자아이였다. - P16

피터 팬은 시큰둥하고 건방져 보이는 눈을 반짝반짝빛내며 매번 열의를 담아 호소하듯이 대사를 외쳤다. 어떤 대사든 똑같이 발음했다. 억양도 없고 동작도 과장됐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오로지 목소리를 내는 데만 열중하는 그처럼 나도 똑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거칠게 내뱉었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나를 깨달았다. - P16

그가 마구 뛰자 운동 부족인 내 새하얀 허벅지가 안쪽에서부터 경련했다. 개가 그림자를 물어뜯었다고 우는 그를 보자 내게 전염된 슬픔까지 끌어안고 싶었다. 유연함을 되찾기 시작한 심장은 흐르는 피를 무겁게 밀어내어 굽이치며 뜨거운 기운이 돌게 했다. 밖으로 채 발산하지 못한열기가 움켜쥔 손이나 오므린 허벅지에 고였다. 그가 무턱대고 가는 칼을 휘두르고, 궁지에 몰리고, 그의 옆구리에 상대방의 무기가 스칠 때마다 내 장기에 섬뜩하게 칼날이 닿는 기분이었다. 배 끄트머리에서 그가 후크 선장을 바다로 떠밀고 고개를 든 순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냉정한 시선에 흥분해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우아아, 얼빠진 혼잣말이 나왔다. 미쳤다. 대박이다, 일부러 머릿속으로 말해봤다. 이 아이라면 틀림없이 선장의 왼손을 잘라 악어에게 먹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 대박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큰 소리로 뱉었다. 들떠서 "네버랜드에 가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나도 모르게 진심이 됐다. - P17

푸른 하늘과 구름과 파스텔 톤 무지개가 있는꿈속 같은 세트로 끌려갔는데, 어른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어두웠고, 새까만 촬영 장비들 너머에서 물떼새 무늬원피스를 입은 어머니가 이렇게...... 손을 가슴 앞에서흔들었어요. 겨우 5미터 거리였지만 꼭 작별 인사 같아서울 뻔했는데 곰 인형이 이렇게, 아세요?"
"아, 슈왓치* 말이죠. 라디오니까 몸은 그만 움직일래요?"
"그러네.(웃음) 아무튼 곰 인형이 그렇게 하면서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거예요. 나는 울고 싶었는데 웃었어요. 곰 인형 눈에 비친 내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완벽해서, 그때부터 매번 그 곰 인형이 같은동작으로 나를 웃겨줬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만들어낸웃음인 걸 아무도 모르는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구나." - P25

"아니, 가끔 있어요. 언제부터 좋아했다거나 몇 년 전부터 응원했다거나 근황 보고 같은 자기 이야기만 잔뜩 적은 편지를 보내는 팬이요. 기뻐요, 기쁘긴 한데 왠지 심리적인 거리가...."
"그야 팬이 어떻게 알겠어요. 항상 우에노 씨를 보고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곁에 있는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죠. 대화하다가도, 지금 이 녀석 내가 하는 말이 뭔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네 싶어요."
"앗, 설마 나도 그럽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모르겠네. 이마무라 씨는 적당히 칭찬하는 습관이 있잖아요."
"심한데? 나는 진심이라고요, 언제나.(웃음)"
"죄송, 죄송합니다.(웃음) 아니, 그러니까 가사를 쓰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구 한 사람쯤은 알아줄지도 모르니까, 뭔가 간파해줄 지도 모르니까요. 안그러면 못 버텨요, 무대에 서는 거요." - P26

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자욱했다. 어두운 구름은 해변 가까이 서 있는 집들을 감추었다. 최애의 세계에 닿으면 보이는 세상도 달라진다.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러면귀에서 흐르는 최애의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기분이 든다. 내 목소리에 최애의 목소리가 겹치고, 내 눈에 최애의 눈이 겹친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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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사람들의 인생을 요약하면 마음에 상처를 입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평생 내면의 상처, 스트레스와 전투를 벌이는 것이죠이를테면 불같다고나 할까요? 예민한 사람들의 감각은항상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그들의 ‘내면‘이라는 초원에는 언제든 들불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그 불길을 잡느라 온갖 진을 빼고, 다음에 날 불에 대해미리부터 걱정하게 되죠. 결국 어떻게 해야 불이 안 나게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불을 잘 끌 수 있을지 각종 노하우가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들불이라는 자연재해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HSP들의 예민한 감각이라는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는 한은 말이죠.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서 HSP들의 초원에 주기적으로비를 내릴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요? 시원하게 비가 내리면 불은 꺼지기 마련입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건조한 지역에서나 화재를 걱정하지,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에서는 불이 나더라도 금세 진압되고, 그러니 사람들은불이 날까 봐 걱정하는 데 쓰는 에너지를 다른 일들에 쓸수 있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시간, 즉 자기돌봄(self care)은 예민한 사람들에게 바로 이 비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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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노력을 뽑아내기만 하면 노력의 역설로 인해 노력한 사람은 그 대상에게 반드시 깊은 애착을 지니게 됩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 대상은 반드시 가치 있어야만 해‘라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인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누군가로부터 상당한 양의노력을 수월하게 뽑아낼 수 있을까요? 가장 적합한 대상이 바로 남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기버인 것입니다. - P112

우리는 사랑할 만한 대상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많은 것들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사랑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노력의 역설은 일종의 자기합리화에 해당합니다. - P112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본다면 예민한 사람들은 ‘상황‘을 중심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동으로 주변 상황의 흐름이 머릿속으로 물밀듯이 밀려들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그나마 ‘내가제일 덜 불편한 경우는 무엇일까?‘를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내가 상황에 적절히 맞춰줌으로써 불편한 분위기를 끝내는 것이죠.
예민한 사람들은 내 감정에만 예민한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공기 그 자체에도 무척 예민합니다. 한 공간 안에 나와 A, B, C, D 총 다섯 명이 있다면, 예민한 사람들은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의사결정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문제이더라도 말이죠. A, B, C, D가 불행하다면 이 4명이 느끼는 불행의 크기가 나의 행복의 크기보다 훨씬 거대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간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예민한 사람들이 기가 막힌 팀 플레이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 P122

우리가 육체적 상처를 입을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당연하듯 정신적 상처를 입을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대로 계속 회피형으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요? 오히려 회피했기 때문에 이제껏 무수한 정신적 고통을 피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회피라는 단어보다는 회피‘력‘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즉 회피를 단순히 도망치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잠재적 위협 거리들을 포착해이를 무사히 피해 갈 수 있도록 돕는 역량이라고 보는 것이죠. 게임으로 치자면 몬스터들과 마주칠 때마다 신속히회피해냄으로써 계속 체력을 유지한 채로 모험을 다닐 수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랄까요? - P164

상담을 하다 보면 회피형 패턴을 보이는 사람 중에서는잘 맞지 않는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애당초 회피형에게는 인간관계에서 끝없는 정리 정돈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의 문제이지 결국 어떤 식으로든정리가 된다는 거죠. 고통이 임계치를 돌파하게 되면 정이고, 의리고 내 정신 건강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정리될 인연, 고통이 임계치에 다다를 때까지 참고 견디느니, 그 전에 마음을 독하게먹고 관계를 정리하면서 에너지를 비축해놓는 게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선택일 겁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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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사람들에게 인간 관계가 지옥같은 이유는 내 것도 아닌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휩쓸려 다니다 하루를 망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 친구 중 짜증을 잘 내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 예민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그 짜증과 화에 전염됩니다.
그리고 내 것도 아닌 그 짜증과 화를 다루느라 온 기력을 소진하게 되죠.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주변인들의 온갖 감정을 짊어진 채로 하루하루를 살기 때문에 예민한 사람들은 참고 참다 결국에는 인간관계를 확 놓아버리는 회피형으로서의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 P82

따라서 예민한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안 맞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철저하게 정리하고, 좋은 사람들과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 P82

예민한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남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특히 더 꺼리는 특성이 있어 결국 끝까지 부탁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혼자 독자 노선을 걸으며모든 걸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민한 사람들의 이러한 독자 노선은 기질적인 독립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예민한 사람들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자리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생일을 예로 든다면, 날 위해 지인들이 그들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것, 날 위해 선물을 고르느라 그들의 소중한 돈과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일일이 보답해야 한다는박감 등 생일을 맞이해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축하가내 마음속에서는 되갚아야 할 일종의 대출 장부처럼 여겨지는 것이죠.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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