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모든 게 그냥 낭비 같다. 가상현실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건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꼭 물리적 공간을 이렇게 공들여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 P14

예를 들어 아르카디아에서 장거리를 움직이려면 전차나 지하철을 타야 한다. 두 점 사이의 거리가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있는 척하며 게임 규칙을 따라야 한다. 코발렙스카야처럼 가상현실에 에너지의 10% 미만만 쓰는 정상적인 소행성에는 이따위 낭비가 없다.
여기엔 현실적인 물리적 공간과 물리법칙의 강요가 죽어가는 거주자들의 정신적 안정감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가 있다. 광장을 둘러싼 블록 스물네 개를 차지하는 시티 지역의 번잡함과 소음, 가끔 도시를 휩쓰는 폭우와 폭설, 이미 사라졌거나 처음부터 존재한 적 없는 브랜드의 호사스러운 광고물, 꾸준히 고정된 하늘길을 지나가는 비행기와 비행선도 마찬가지 이유로 존재한다. 하지만 왜 다른 양로원에서는 이를 채택하지 않는 걸까.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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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고대 영웅이에요. 아주 옛날 옛적 이야기에요. 디아스포라가 일어나기 3000년 전 이야기죠."
"흠. 그런데 전 세계를 항해했다고요?"
"맞아요. 테세우스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항해했어요. 그동안 배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뜯어져 배를 고쳐야했어요. 몇 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원래 선체를 구성했던 목재는 모두 교체되고 없었어요. 이 경우에 테세우스의 배는 출발할 때와 같은 배일까요? 아닐까요?"
"멍청한 질문이네요. 당연히 같은 배죠."
"좋아요. 만약 배가 폭풍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 전에 완전히 새로운 배를 지어야 하면요? 그래도 여전히 같은 배인가요?"
"아니요. 그건 완전히 다른 경우죠. 배 전체를 다시 지었다면 테세우스 2호가 되겠죠. 후속작인 셈이니까."
젬마는 팔꿈치를 식탁에 올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래요? 왜죠? 모든 부품을 하나씩 하나씩 다 뜯어고쳤을 때와 한번에 배 전체를 다시 지었을 때가 어째서 다른가요?"
나는 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 P132

"이 임무를 맡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에요. 당신이바로 테세우스의 배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 그렇죠. 지금 내몸을 이루는 세포 중에서 10년 전에도 존재했거나 몸의 일부였던 세포는 없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 지어져요. 한 번에 한 부분씩 수리되는 셈이죠. 당신이 이임무를 맡게 된다면 당신은 한꺼번에 새로 지어지는 셈이에요. 하지만 결국 똑같지 않나요? 익스펜더블이 재생 탱크에서 나오는 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천천히 진행될 일을 한번에 처리하는 셈이에요.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진짜 죽은 게아니에요. 비정상적으로 빠른 리모델링을 할 뿐이죠."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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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1~18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다.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주님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 주님께서는, 엎드려서 나를 노리는 곰과 같고, 몰래 숨어서 나를 노리는 사자와 같으시다. 길을 잘못 들게 하시며, 내몸을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주님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신다. 주님께서 화살통에서 뽑은 화살로 내 심장을 뚫으시니, 내 백성이 모두 나를 조롱하고, 온종일 놀려댄다. 쓸개즙으로 나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내 배를 채우신다. 돌로 내 이를 바수시고, 나의 얼굴을 땅에 비비신다. 내게서 평안을 빼앗으시니, 나는 행복을 잊고 말았다. 나오느니 탄식뿐이다. 이제 내게서는 찬란함도 사라지고, 주님께 두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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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좀 힘들어. 그리고 네가 죽을 때마다 매번 더 힘들어져 지난밤에는 정말 괴로웠어. 식스가 죽었을 때보다도, 파이브한테 일이 생겼을 때보다도 더 힘들었어. 종료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나는 네가 마음을 바꾸길 바라면서 계속 통신 가능한 거리에서 비행하고 있었어. 결국 포기하고 돔 격납고로 돌아온 다음에도 조종석에 앉아서 한 시간을 어린아이처럼 울었어. 하지만 지금 네가 여기에 있고, 네 이야기처럼 내가 만약 어젯밤에 너를 구했다면 지금의 너는 여기 없을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불멸이란 참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렇지?"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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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하면서 느꼈던 내 마음속 혼돈은 화면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씩 카메라 앵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내 얼굴엔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이 분명하게 서려 있었지만, 그건 편집자의 관심 밖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의 시선에서는 사소한 배경으로 뭉뚱그려질 뿐이었다.
나는 내 마음의 무게가 드러나지 않음에 감사하면서도, 그간 봐왔던 수많은 방송들 속에서 나는 과연보려고 마음먹은 것을 본 건지, 누군가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것을 덥석 건네받았을 뿐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 P130

나는 촬영 이후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일권 PD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불편한 감정과 그의 실루엣을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잠깐 동안 괴로워했다.
그러나 꺼림칙한 것을 담아내는 것을 업으로 삼는 PD가 게시글 너머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아직 촬영 중인 것 같았다. 그의 데뷔작보다 훨씬 더 길고 너른 배경의, 그리고 한층 더 꺼림칙한.
싫은 사람의 수는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쯤 될 테니 그가 소재 고갈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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