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셰인빌 주민 한 명이 리앤더의 남부연합기를 프라이드 플래그로 몰래 바꿔놓았다. 오스틴 부인이 벌인 일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오스틴 가족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들이었고 성소수자에 대해 마냥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리앤더 씨는총천연색 무지개 깃발을 뒷마당에서 태워버린 뒤 다시 남부연합기를 내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연합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깃대에는 프라이드 플래그 두 개가 걸려 있었다. 그런 날이 며칠 반복됐다. 아침마다 자신의 집에 걸린 무지개 깃발을 발견하고 고함을 내지르던 리앤더 씨는 결국 남부연합기를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프라이드 플래그를 태우던 날 리앤더 씨는 씩씩거리며 어차피 대통령은 트럼프야, 이 자식들아, 하고 소리쳤다. - P126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은 사회가 감당하던 비도덕적 행위의 한계치를 높여놓았고, 그래서 누구도 내게 위협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조차 나는 은근한 위압감과 불안에 시달렸다. 집단으로 린치를 가하던 중학생들이, 나를 강도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던 질리언 베일리가, 프랜시스 후버가 미치 램버트가 두려웠다. 버젓이 남부연합기를 내걸고 프라이드 플래그를 태우던 휴고 리앤더가 두려웠다. 내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잠재적 가해자가 두려웠다. - P127

"넌 똑똑해. 난 그걸 알아. 그러니까 공부해. 공부해서 대학에가. 변호사가 되건 의사가 되건 그렇게 해. 그러면 아무도 널 무시하지 못할 거야. 결국 미국은 돈이거든. 사람들이 너한테서 파란색을 보게 만들지 마. 녹색을 보게 만들어. 달러 말이야. 널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 안면에 그린백(greenback)을 꽂아주라고."
삼촌이 말하는 동안 내 눈은 줄곧 호수를 향해 있었다. 깊이를가늠할 수 없는 웅덩이는 검고 막막해 보였다. 그 끝을 확인하고싶었다. - P144

다음 날 학교 복도에서 사이먼을 봤다. 캐비닛 앞에서 루크를•비롯한 여러 애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먼은 이별하지않은 사람처럼 밝게 웃었다. 서글서글한 눈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사이먼이 쓸모없어진 클로이를 폐기 처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반짝이는 트로피, 자신이 선량한 이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명찰, 파란 피부의 친구라는 타이틀, 한때 그러했던 기록. - P156

타인의 미래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이먼, 루크, 에밀리, 네이트, 레이철, 미치・・・・・・ 모두의 궤적을 이을 수 있었다. 수년 후의 윤곽선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미래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내게는 1년 후도 불투명했다. 인천을 떠나 조지아로 향할 때처럼, 여전히 불확실한 인간이었다. 가지를 치던 생각이 엄마에게 닿았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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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중앙에 위치한 식당은 학생 모두를 수용하기에 너무 작았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시간에 식사를 했는데, 사실 절반을 수용하기에도 충분한 크기는 아니었다. 빈자리에 식판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맞은편에 에밀리 라슨이 앉았다. 셰인빌고등학교 10학년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너드(nerd), 긱(geek), 드윕(dweeb), 도크(dork) 사이에 확실하고 선명한 작(jock)이었다. - P94

"오바마는 하와이에서 태어났어. 기독교인이고, 설령 네 말이 사실이라도, 무슬림을 모두 이 나라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하지만 필요하다면 걸러낼 필요는 있어."
"나치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
"와, 비약이 심하네."
"너 대체 뭘 신봉하는 거야. 소속을 확실히 해. 알트라이트(alt-lite)? 네오파시즘? 인셀? 집에서 <에잇챈(8chan)>이랑 <스톰프런트(Stormfront)> 게시판만 들여다보는 거 아냐?"
"트럼프 지지자가 모두 대안 우파는 아니야"
후버 선생님은 둘에게 자중하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레이철은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넌 아이시스(ISIS)가 오바마와 힐러리 때문에 결성됐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트럼프는 그렇게 주장하던걸 여성의 성기를 잡았다며 자랑하고 장애인 기자 흉내를 냈던 그 인간말이야. 이라크에서 전사한 무슬림게 군인의 부모까지 조롱하던 그 후보"
"그 후보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워주겠지. 그 사람들 돈으로. 위험한 사람들이 입국하지 못하게 막아줄 거야. 그중에는 아이시스도 포함될 테고. 좌파들이 왜 지는 줄 알아? 가난한 사람들이 어째서 보수정당에 투표하는지 모르거든." - P103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멸시하고 억압하면서 지배 계층이라는 우월감을 느끼는 거야. 정작 본인이 계급의 아래에 놓여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가난한 백인 노동자가 흑인을 멸시하는 모습을 상상해봐. 그런데 한때는 이 나라에서 백인도 차별받았다는 거 아니? 하얀 흑인으로 불리던 아일랜드계 이민자가 있었지. 비숙련 노동자였고 가톨릭 신자였던 사람들.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노예였고, 노예(slave)라는 단어의 어원이 슬라브(slav)지. 그러니까 이건 흑인과백인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야. 모든 인종이 이 구조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명예 백인으로 불리는 아시아인을 봐. 성공한 소수민족 신화 덕에 이 계급사회에 저항하지 않고 섞여들었잖아. 백인이 던져준 먹잇감이지. 백인이 아시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있을 때 옆에서는 굶주린 흑인이 으르렁거리는 거야. 자기들이 체스판 위에 있다는 걸 아무도 몰라. 이 시스템은 열등한 타자를 등장시켜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는데, 서로를 공격하느라 진짜 적이누군지 생각하지 않아. 분리 정복 전략의 효과를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지. 효과가 있다니까. 언제나."
해먼 선생님은 흥분한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말했다.
"죄송해요. 방금 하신 말씀은 못 알아듣겠어요."
"모르는 단어가 있었어?"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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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부색은 나를 계급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보낸다. 다수에 속해 있음이 정상성을 정의하는 세상에서 내 피부는 확연한 비정상이었다. 장애를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살가운 태도로 나를 대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에는 반드시 동정과 연민 그리고 약간의 자기만족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그 음울한 기분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이유 없이 무시당했고 때로는 예고 없는 친절에 당황했다. - P24

비행기는 힘차게 가속했다. 어느덧 새하얀 구름이 발밑에 있었다. 나는 탈출하는 기분이었고, 달아나는 기분이었으며, 동시에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 P41

"내가 와 그랬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아빠가 혼잣말을 했다.
"와 재우를 안 데려왔지."
그 짧은 문장 사이에 생략된 원망이 있었다. 아빠가 그린 선명한 부등호를 읽을 수 있었다. 두 아들 중 더 나은 애를 데려오지않은 자신을 책망하는 아빠 옆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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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정전으로 오전 임시 휴교

코토는 한숨을 쉬었다. 교내 네트워크가 전부 마비된 것일까?
전기가 복구될 때까지 자택에서 대기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기뻐할 것이다. 정전이 되면 교내 보안 장치도 멈추기 때문에아이들을 등교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임시 휴교였다. 이런 정전이 몇 달에 한 번꼴로 발생했기 때문에 당연히 교과 커리큘럼도 이를 전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 P112

"저도 종이책을 꽤 좋아하지만 책은 기호품이잖아요. 사치스러운 취미랄까요. 책에 적힌 내용, 그러니까 데이터야말로 영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데이터는 지식이자 언어이자 감정이자 수치이자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굳이 종이책의 형태일필요는 없지 않나요? 아니면 설마.." - P121

"데이터가 영혼...이라는 점은 동의해요."
코토는 그런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전자책은 무엇보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복사도 간편하고, 다른 자원을 사용하지도 않고, 종이책이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하죠."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 이 시대에 도서관을 운영하는가? 코토가물으려 할 때였다.
"하지만...."
와루츠 씨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 보관된 게 데이터가 아닌 종이책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코토 옆에 놓여 있던 책을 한 권 슬며시 가져와 가슴에안아 들었다.
"영혼만 존재한다면 이렇게 끌어안을 수는 없으니까요."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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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별로 언급될 일이 없다 보니 모르실 수도 있어요. 예전에는 국회 도서관을 비롯해 자료 보존을 목적으로 세워진 모든 특별 도서관의 장서에 마이크로 칩을 심었어요. 그런 장서들의 관리,
특히 위치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 특별 보호사서관이에요."
"그럼 그 말은...."
"본 시설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대여 여부와 상관없이 자료의 위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죠. 본 도서관은 분실이나파손에 따른 배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용자에게금전을 요구하진 않지만 빌려 간 도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반납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말이 어찌나 무겁고 강렬한지 카미오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책의 위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칩을작동시킨다면 책이 어디에 있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문득 좀전에 느꼈던 불가사의한 느낌도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이와나미씨를 어떻게 그렇게 금방 찾았는지. 대여 도서의 위치는 곧 대여자의 위치일 수 있으니까. - P27

"혹시 어제 이와나미 씨를 찾았을 때처럼 위치 정보로 찾아내시는 거예요?"
그 말에 사토미 씨가 시선을 돌렸다.
"그럴 리가요. 이 도서관의 특별 보호 사서관은 와루츠 씨뿐입니다. 저에게는 서적 좌표의 접근 권한이 없고 열람도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하고 카미오가 말을 이어나가려 하는데 다른 손님이나타났는지 등 뒤에서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외
"이쪽 단말기에는 호출 기능도 있어요. 그러니까 못 찾으시겠으면 다시 오세요." - P36

지상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카미오의 몸을 감쌌다. 지상도 충분히 쾌적했는데, 지하는 그 이상으로 최적의 온도와 습도로 맞춰놓은 것 같았다. 사람이 아니라 책을 위해서.
열화되기 시작한 종이와 잉크, 접착제 냄새가 코의 점막을 자극했다.
‘아, 책 냄새구나.‘
카미오는 그것이 책 냄새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런데 왜 이러지? 뭔가... ’
그립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장소에 와 본 적도 없는데 향수가 솟구쳤다.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냄새였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지독하게 폐쇄된 세계가 나왔다. 지상이 낮이라면 지하는 밤이다. 자연광도 조금도 스며들지 않는 공간은 강한 압박감을 주었고, 아주 고요했다. 모든 존재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지상에 비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 꽉 들어찬 책이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있다는 원리를 카미오는 알지 못했다. 지상의 책이 살아 있는 책이라면, 이곳의 책은 마치 잠들어 있는 것같다고 생각했다. 앞서 들어갔던 여성은 이미 숲처럼 늘어선 서가뒤쪽으로 사라졌지만 작은 발소리와 기척은 느껴졌다. - P43

점점 무거워지는 오른손과 점점 가벼워지는 왼손. - P58

카미오는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책은 읽을 때마다 마모되는 것이다. 실체가 있으니 망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전자 형태로만들어진 잡지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P59

"저는 이 도서관의 특별 보호 사서관입니다. 당신이 사에즈리 도서관의 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제가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겁니다."
그녀의 기백과 거침없는 말에 노인은 멈칫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허세를 부렸다. 이내 뺨을 씰룩이며 와루츠 씨를 비웃었다.
"특별 보호 사서관이라고? 그런 건 구시대의 사라져가는 유물일뿐이지. 이렇게 쥐꼬리만 한 도서관의 허약한 네트워크는 바이러스를 침투시킬 필요도 없어. 케이블 하나만 끊어도 다 먹통이 되어버릴 테니까. 네트워크가 만능이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고."
그건 사실이었다. 공공 서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복구되지않았고, 지방 서버의 상태 이상이나 액티브 바이러스, 시스템 버그, 그리고 좀 더 원시적인 이유인 전력 공급 부족으로 네트워크는 자주 다운되었다. 기술자도 극단적으로 줄어든 지금은 정비도 바로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가 다운되면 전체 시스템도 휘청였다.
하지만 와루츠 씨는 웃으며 말했다.
"고작 그 정도로 와루츠 요시아키라의 기억 회로와 통신 네트워크를 정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는 단단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선언했다. 긍지를 갖고, 자신의 존재와 역할을.
"제 이름은 와루츠 유이. 이 도서관의 특별 보호 사서관입니다." - P74

"알렉산드리아를 잊지 마라." - P75

인류의 역사에 책이 등장한 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종이라는 반려를 만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책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형으로서 인간의 곁에 존재해왔다. 심지어 전자원년으로 불리는 반환점을 몇 번이나 거치면서도 책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책이 사라지는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가치와 의미가 바뀌었을 뿐.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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