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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 - 요절할 결심
이묵돌 지음 / 김영사 / 2023년 4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608/pimg_7291462733887104.jpg)
이 책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소회를 담은 여행기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자의 기록이다.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꾸준하게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묵돌 작가의 성실함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문체에 유쾌함과 우울함이 공존하고, 갑자기 훅 깊은 통찰로 들어가기도 한다. 재미난 사람임은 분명하다. 꽤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적은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과정 자체에 대한 생각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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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어디로 떠나고 싶은 때에 바로 실행에 옮기는 일, 이묵돌 작가는 그걸 해냈다. 그것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떠난다고 해서 주어진 상황이나 떠안은 문제가 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여행하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고, 여전히 편집자로부터 마감의 압박을 받는다.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도착하자마자 악명 높은 여행객 대상 택시 덤탱이 사기를 당하고, 코로나19에 걸려 며칠 내내 고생하는 와중에 계속 글을 쓰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갑자기 귀국행 비행기가 취소된다. 끝까지 순탄하지 않다.
다행히 그 가운데 다정함을 건네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혼자 힘겹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기도,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며 크고 작은 시련을 잘 감당한다. 문제 투성이인 상황 때문에 자책이나 상념에 빠져 있다가도 여행지를 둘러보거나 주변인들과 스몰토크를 나누며 금세 유쾌해지는 여행의 묘미가 책에 담겨있다.
‘또 보자’는 건 그냥 해보는 말일뿐이고, 사실은 다시 볼 일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썩 나쁘지 않았고, 내가 보기에 당신은 꽤 좋은 사람 같다’는 느낌을 한 마디로 줄여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에선 그것을 ‘다 스비다냐’라고 한다. 나는 지금껏 이 러시아 땅에서,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며 여기까지 왔나.
p310.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짧은 기간 자신의 집에 머무른 저자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었던 나탈리야나, 그에게 더 배울 수 있다고 격려하는 안드레이와의 만남이 그에게 진한 흔적을 남겼다. 코로나19로 아픈 와중에도 나탈리야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 피해를 줄까, 오밤중에 쫓겨나는 건가 걱정하던 그에게 다정한 연락을 남기고 마지막까지 신경을 써주며 큰 위로를 건넨 사람을 어떻게 잊을까. 그리고 ‘넌 더 배울 수 있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배울 의지가 있으면서 왜 거짓말하냐’는 말로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안드레이의 말은 귀국 후 작가가 새로운 결심을 하는데 일조했다.
이묵돌 작가는 한국에 돌아온 후 대학에 재입학 했다. 불면증도 나았다. 물론 여행이 모든 상황을 낫게 하는 건 아니다. 귀국하자마자 실업급여 신청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서울로 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피식 웃음이 터진다. 수습하고, 마감에 쫓기는 일상은 계속된다. 그래도 늘 해결할 방법은 있다. 때로는 걱정한 것에 비해 가뿐히 해결되기도 하고 말이다. 여행 중 겪은 강렬한 사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일들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자신감이 생기는 거다. 그 자신감이 고갈되면 또 한 번 떠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는 썩 나쁘지 않았고, 내가 보기에 나는 꽤 좋은 사람 같다’는 감각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니 때로 스스로에게 질려 견딜 수 없을 때 무작정 도망가는 일도 괜찮은 것 같다.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여로’, 다시 나에게 돌아가기까지 남은 길이 될 수 있다(p.390). 요절할 결심을 하고 떠난 곳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고 온 작가의 이야기, 절망과 감탄이 반복되는 매일의 기록 속에서 나도 용기를 얻는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