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 - 요절할 결심
이묵돌 지음 / 김영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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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소회를 담은 여행기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자의 기록이다.


장면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렇게 꾸준하게 기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이묵돌 작가의 성실함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문체에 유쾌함과 우울함이 공존하고, 갑자기 훅 깊은 통찰로 들어가기도 한다. 재미난 사람임은 분명하다. 꽤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읽을 수 있었다. 러시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적은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떠나고 돌아오는 과정 자체에 대한 생각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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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어디로 떠나고 싶은 때에 바로 실행에 옮기는 일, 이묵돌 작가는 그걸 해냈다. 그것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다. 떠난다고 해서 주어진 상황이나 떠안은 문제가 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여행하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고, 여전히 편집자로부터 마감의 압박을 받는다.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난다. 도착하자마자 악명 높은 여행객 대상 택시 덤탱이 사기를 당하고, 코로나19에 걸려 며칠 내내 고생하는 와중에 계속 글을 쓰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갑자기 귀국행 비행기가 취소된다. 끝까지 순탄하지 않다.


다행히 그 가운데 다정함을 건네는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혼자 힘겹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기도,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며 크고 작은 시련을 잘 감당한다. 문제 투성이인 상황 때문에 자책이나 상념에 빠져 있다가도 여행지를 둘러보거나 주변인들과 스몰토크를 나누며 금세 유쾌해지는 여행의 묘미가 책에 담겨있다.


‘또 보자’는 건 그냥 해보는 말일뿐이고, 사실은 다시 볼 일이 전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썩 나쁘지 않았고, 내가 보기에 당신은 꽤 좋은 사람 같다’는 느낌을 한 마디로 줄여 부르는 것이다. 러시아에선 그것을 ‘다 스비다냐’라고 한다. 나는 지금껏 이 러시아 땅에서, 몇 번이나 그 말을 하며 여기까지 왔나.

p310.

여행지에서의 만남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짧은 기간 자신의 집에 머무른 저자에게 기꺼이 친절을 베풀었던 나탈리야나, 그에게 더 배울 수 있다고 격려하는 안드레이와의 만남이 그에게 진한 흔적을 남겼다. 코로나19로 아픈 와중에도 나탈리야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뱃속의 아이에게 피해를 줄까, 오밤중에 쫓겨나는 건가 걱정하던 그에게 다정한 연락을 남기고 마지막까지 신경을 써주며 큰 위로를 건넨 사람을 어떻게 잊을까. 그리고 ‘넌 더 배울 수 있고 더 큰일을 할 수 있다, 배울 의지가 있으면서 왜 거짓말하냐’는 말로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안드레이의 말은 귀국 후 작가가 새로운 결심을 하는데 일조했다.

이묵돌 작가는 한국에 돌아온 후 대학에 재입학 했다. 불면증도 나았다. 물론 여행이 모든 상황을 낫게 하는 건 아니다. 귀국하자마자 실업급여 신청 마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서울로 향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 피식 웃음이 터진다. 수습하고, 마감에 쫓기는 일상은 계속된다. 그래도 늘 해결할 방법은 있다. 때로는 걱정한 것에 비해 가뿐히 해결되기도 하고 말이다. 여행 중 겪은 강렬한 사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일들도 있었는데.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자신감이 생기는 거다. 그 자신감이 고갈되면 또 한 번 떠나면 될 일이다. ‘지금까지는 썩 나쁘지 않았고, 내가 보기에 나는 꽤 좋은 사람 같다’는 감각을 가지고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여행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니 때로 스스로에게 질려 견딜 수 없을 때 무작정 도망가는 일도 괜찮은 것 같다.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지만 마냥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내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여로’, 다시 나에게 돌아가기까지 남은 길이 될 수 있다(p.390). 요절할 결심을 하고 떠난 곳에서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발견하고 온 작가의 이야기, 절망과 감탄이 반복되는 매일의 기록 속에서 나도 용기를 얻는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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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꽃 한 송이 - 매일 꽃을 보는 기쁨 날마다 시리즈
미란다 자낫카 지음, 박원순 옮김 / 김영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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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미란다 자낫카는 영국 코톨드미술학교에서 미술사학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영국 큐 왕립식물원(큐 가든)The Royal Botanic Garden, Kew에서 5년 동안 식물 원예가로 일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처음 받아 펼쳤을 때의 감상은 ‘아 예쁘다.’였다. 보는 맛이 있도록 감각적으로 잘 구성되었다. 인간의 삶과 떼어낼 수 없는 꽃이기에 미술 작품, 영화 포스터, 음식, 조각상, 드레스 등의 다양한 사진이 실려 있다. 단순히 꽃의 명칭과 생김새, 품종 등을 나열하는 딱딱한 사전식 설명이 아니라 각 꽃과 연관된 이야기나 일화 혹은 특성 등을 엮어냈다.




<날마다 꽃 한 송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페이지마다 날짜가 적혀 있는데, 계절의 흐름을 고려하여 큐레이션 했기에 각 월에 만개하는 꽃들이 소개되어 있다. 일력처럼, 매일 어떤 꽃이 나올지 기대하는 맛도 있겠다. 소중한 사람들의 생일 날짜에는 어떤 꽃이 수록되어 있는지 찾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날마다 꽃을 보며 즐거움과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날마다 새로운 꽃을 보는 일은 매일 새로운 영감을 얻는 일이다. 생각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이 경험을 놓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로 빛난다. 벌들이 꽃에서 꽃가루와 꿀을 얻듯 사람들도 꽃에서 마음의 양식과 달콤한 감정들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옮긴이의 말 / p.379.


벌써 5월, 학기 절반이 지나갔다. 슬슬 지칠 때가 되었는지 툭하면 흐린 눈이 되기 일쑤다. 그런 하루 중에도 나를 즐겁게 하는 건 곳곳에 보이는 꽃들이다. 꽃을 볼 때면 발걸음을 쉽게 멈춘다. 예쁨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갤러리에 꽃 사진이 가득하다. 최근 비가 이상하게 오고 할 일은 산더미에 공부하는 내용도 이해되지 않아 답답하던 날, 학교에 피어 있는 수선화를 보고 곧바로 웃음을 되찾았다.


10년 만에 <어바웃 타임>을 다시 봤다. 사랑스러운 장면이 너무 많은 영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두 번씩 하루를 살아보는 장면이었다. 처음엔 바삐 점심거리를 주문하고, 재판에 늦을까 허겁지겁 뛰고, 상사에게 꾸중을 듣고, 승소에 겨우 긴장을 풀고, 지친 퇴근길 속 옆 사람의 이어폰 속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노랫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는 힘겨운 날이었다. 그 하루를 다시 살았을 때, 이전과 달리 곳곳에 숨겨진 여유와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는 주인공을 본다. 종업원에게 눈을 맞추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뛰어가는 중 지하철역이 아름답다며 감탄하고, 상사의 꾸중을 듣는 중에 동료에게 장난을 치며,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노랫소리에 맞추어 리듬을 탄다. 자기 전 아내의 ‘그래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하루였네?’라는 말에 ‘그래, 사실 좋은 편에 속하지.’라고 대답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긴장과 걱정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며’ 살고 싶다. 이 책에 손 뻗는 순간마다 다시 아름다움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하루를 순식간에 아름답게 만드는 통로가 되어줄 책이다. 매일을 소중히 여기며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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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는 오늘도 짝사랑 중 - 동물을 돌보는 기쁨, 동물의 아픔을 보는 슬픔, 수의사 일일드라마
김명철 지음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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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갑자기 집 마당에 나타난 검은색 솜뭉치로 인해 우리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깜냥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밥을 챙겨주는 정도였다. 작년 10월 깜냥이가 새끼 고양이를 낳았다. 그중 몸이 약한 아이를 집에서 보살피며 고양이를 집에 들이게 되었다. 밤낮으로 밥을 먹이고 약을 먹여 건강을 회복한 아이에게는 눈이 예뻐 ‘단추’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니 떡하니 표지에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이 책을 지나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고양이들의 건강을 신경 쓰면서 동물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데, 갈 때마다 수의사 선생님의 친절함에 감사함을 느낀다. 초보 집사인 탓에 한번 방문할 때마다 여러 질문을 하는데 알고 싶었던 정보보다 더 많은 걸 알려주신다. 피곤한 모습인데도 목소리는 늘 활기가 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동네 수의사분에 대한 감사함이 더 커졌다. 다음에 방문할 때에는 박카스라도 하나 사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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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 타는 수의사>라는 꼭지에 이상적인 수의사에 대해 적은 내용이 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문장들이 김명철 수의사님의 다짐처럼 다가왔다. 몇몇 에피소드에는 마음이 힘들어 며칠 내내 입맛을 잃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직업이 그렇지만, 수의사는 특별히 사랑 없이는 절대 이어갈 수 없는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몰아치는 일정을 소화한 후에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여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어디 이뿐인가, 보호자들이 환자로 찾아온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도록 때로는 다독이고 때로는 설득해야 한다. 경제관념을 가지고 똑똑하게 병원을 경영해야 한다. 지나친 감정이입보다는 냉철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잘 돌봐야 한다.

🐈‍⬛ 근무시간 이후에도 완전한 퇴근을 하지 못한다. 상태가 좋지 않은 입원 환자가 있을 경우, 집에 도착해서도 대부분 편히 쉬지 못하고 환자의 상태가 달라졌다는 연락이 올까 봐 항상 휴대전화 옆에 두고 날이 서 있기 마련이다. 이 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 퇴근 후에도 병원에 전화해 환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 (p.107.)

🐈‍⬛ 치료 결과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결국은 무너져 내려 다른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다. 자책보다는 복기를 해야 하며, 복기는 나중에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과정이지 나를 채찍질하기 위한 시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pp. 156-157.)

🐈‍⬛ 대부분의 동물 병원은 공휴일 없이 일하고 주 5일, 게다가 근무시간을 초과하여 일을 하는데 퇴근 이후의 시간조차도 일에 잠식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p.158.)

특히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에 일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명감이 없다면 절대 지속할 수 없다. 수의사의 자살률과 우울증 비율이 높다는 것도 어쩌면 이런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할 테다. 수의사분들이 꼭 충분히 휴식할 수 있길, 너무 오랫동안 아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기기 구입과 운영 관리 등으로 초기 투자비용과 고정 유지비가 높기 때문에 일반 병원에 비해 수익을 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어떤 수의사분은 월급을 포기해가면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근무 환경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 개선 또한 이루어져야 할 텐데 더디더라도 조금씩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도 사랑스러운 고양이 앞에서는 ‘물렁이는 물풍선’ 같은 고양이의 배처럼 한없이 말랑해지는 수의사. 오랫동안 병을 앓던 환자가 치료되어 나갔을 때의 그 기쁨, 초보 집사들에게 이런저런 고양이 관련 지식을 설명하는 기쁨. 이런 것들이 수의사로서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라고 하니 ‘역시 가장 밑에 있는 것은 사랑이구나, 사랑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지탱해 주는구나’ 싶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때.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작은 선택들이 실은 내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가는 이정표였다는 확신이 들 때. 그리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될 때. 그때 나의 직업이자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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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드라마는 한 직업에 대해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좋다. 이번 수의사 편은 사랑스러운 일화에 피식거렸고, 빈틈없는 일정을 소화해 내는 내용에는 마음이 함께 바빠졌다. 동물 병원과 수의사 근무 환경의 실태를 다룬 부분을 읽으며 덩달아 심각해지기도 했다. 내용이 마냥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책 한 권 달랑 들고나가 가뿐하고 산뜻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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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이유 - 자연과의 우정, 희망 그리고 깨달음의 여정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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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구달은 『희망의 이유』를 통해 자신의 삶을 쭉 들려준다. 제인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침팬지 연구자, 침팬지를 사랑하는 사람 정도가 전부였기에 그녀가 시 짓기를 즐긴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책 곳곳에 제인의 창작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기억이 삶에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만 처음 알았다. 주변 어른들의 삶을 역사적 사건과 좀처럼 연결하지 못하는 나의 부족한 상상력 탓이다. 아무튼 우연적이기도, 필연적이기도 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제인을 이루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프리카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었다. p.71.(준비)

 그때 반짝이는 별 아래 드리워진 기름호두야자의 잎 사이로 부드럽게 살랑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이 새로운 숲의 세계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여기가 바로 내가 있기로 예정된 곳이라고 느꼈다. p.104. (곰베에서)

 시카고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나는 《곰베의 침팬지들》 2권을 계획하고 있던 연구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시카고를 떠날 때에는 이미 침팬지 보호와 교육 활동에 전념하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책 2권을 쓰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p.291.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올해로 만 24세, 제인이 첫 아프리카행 경비를 모으던 때의 나이와 비슷하다. 아프리카에서 그녀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었다. 그때부터 제인은 환경보호와 평화를 지키는 일에 헌신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내게도 분명 찾아올 텐데, 아직은 그 순간을 만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있다고 본다. ‘나의 인생이 영원히 바뀔 곳’이자 ‘내가 있기로 예정된 곳’이 어디가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그녀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도움, 자연으로부터 얻는 기쁨, 그리고 내적인 힘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이런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믿는다.

■ 이제 책이 완성되었고, 사진 선정도 끝났고, 제목도 정해졌다. 하지만 여정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p.391.

인생을 뒤흔들어놓은 경험은 없어도 제인과 지향점은 같다. 세상은 반드시 더 나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낙담시키는 일이 너무나 많다. 팬데믹, 끔찍한 인명사고, 자연 파괴와 같은 커다란 사건은 물론이고 당장 부족한 나 자신 때문에도 마음이 주저앉는다. 그러나 제인은 전쟁, 남편과의 사별, 동물학대현장 목격, 911 테러 등의 여러 사건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반복해서 말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책이 출간된 지 24년이 지났음에도 침팬지를 향한 열정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을 그녀로부터 격려를 받는다. 책에 직접 인용된 구절은 아니지만,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 ‘강하고 담대하라 (수1:9)’는 성경 문구가 마음 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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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 - 장애, 세상을 재설계하다
사라 헨드렌 지음, 조은영 옮김 / 김영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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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의 몸이 증강된 몸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나와 다른 몸 또한 돌아보게 한다. 그 몸들을 통해 마주하는 세상은 새롭다.

■ 몸은 아주 단순한 것에서부터 기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것까지 수많은 증강물이 추가된 바디 플러스 body plus 상태로 살아간다. 당신이 유난히 장애가 되는 환경에 살면서 보철장치로 몸을 확장하는 10억 명 중 하나든, 매일 콘택트렌즈나 교정 신발을 착용하는 사람이든, 당신의 일상은 바디 플러스가 가장 진정한 상태라는 증거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일상의 형태에 상충하는 몸들을 돌아본다면, 레너드 데이비스가 주장했듯이 “존재의 예외적 상태로 보였던 장애가 사실 존재의 극히 평범한 상태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또한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라는 말은 너무 쉽게 할 수 있어서 도리어 할 수 없는 말이다.” 너무 손쉬운 총체적 일반화라서 어떤 몸에는 그러하고 어떤 몸에는 그러하지 않은 부적합의 특정한 현실을 가리게 된다는 뜻이다. p.47.

지난주 배터리 교체 수리를 맡겨 3일 동안 강제 스마트폰 디톡스를 했다. 좋은 점 보다 불편한 게 훨씬 많았다. 일정 관리, 할 일 정리를 모두 스마트폰으로 하는 나로서는 머리 하나에 의존해 생활하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지하철 노선도와 누군가의 전화번호 이 모든 걸 손쉽게 찾을 수 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렇게나 스마트폰에 의존을 많이 해왔구나 싶어 새삼스러웠다. 스마트폰 말고도 없으면 불편한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지 모르겠다. 일상에 익숙해진 나머지 바디 플러스 상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는다.

일상에 쉽게 무뎌진 이유는 세상이 ‘표준’에 맞추어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평균에 비해 비교적 키가 작은 나는 때로 지하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는 게 어렵다. 하지만 크게 불편함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저신장 장애인의 몸으로 보는 세상은 이와 다르다. 강의실에 들어와 강연대에 서는 일도 특별한 보조가 필요하다. 거리는 휠체어 이용자나 노인, 아이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들에게 매일 차별을 실감하게 하는 곳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크게 놀랍지 않은 연석 경사로는 수많은 투쟁으로 얻어낸 결과다. 신호등을 건너는 시간 또한 누군가에게는 버거울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 장애 연구는 몸과 세상의 이런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유용한 모델을 제시한다. 순수한 의학적 모델에서는 손상의 위치가 몸이며, 손상된 몸을 가진 사람이 책임을 진다. 즉, 장애에 대한 대처, 생존, 극복, 그 외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개인이 자신의 개별적인 조건과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서는 시나리오가 몸에서 주변으로 확장된다.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었든 몸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가능 또는 불가능하게 만드는 도구, 시설물, 교실, 보도 그리고 인간의 번영을 이루는 제도와 경제라는 더 큰 구조가 포함된다. 사회적 모델에서 장애를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몸의 조건과 세상의 형태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장애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의 문제이다. p.31.

한편 이 책은 개인이 여러 도구를 사용해 세상에 적응하는 방식도 소개한다.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적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첨단 기술이 동원된 의수를 착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수를 거부하고 케이블 타이만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주어진 자원을 활용하여 적응하는 변화무쌍한 몸을 본다.​

개인의 차원에서 다양한 기술을 적용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견고한 정상성의 환상을 벗어나 바뀌어야 할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를 읽다 보면 몸과 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 안도하기도,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함에 경각심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 살짝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여러 장애와 그를 경유하여 보는 세상을 소개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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