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공원의 위로
배정한 지음 / 김영사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 이렇게 매력적인 공원이 많다니!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이다. 연구가 업인 교수님의 수고 덕에 한 권의 책으로 이렇게 우리나라의 공원에 대해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저자 배정한 교수는 조경학 전공이다. 그래서인지 공원의 형성 배경, 역사, 의미 등을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인문학적으로 살펴보기도 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글에 깊이를 더해준다. 인용된 책들도 많은데, 읽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책들이어서 시간될 때 한 권 씩 읽어보려고 한다. 책을 읽으며 공원의 매력을 흠뻑 느낀 뒤에는 부록으로 실려있는 ‘저자가 추천하는 공원 리스트’를 참고해 직접 공원으로 길을 나서기도 좋게 구성되어 있다.

‘그곳을 걸으면 눅눅한 머릿속이 바삭해진다’는 문장이 책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 정도로 공원에 대해 저자분이 가장 명쾌하게 정의내리는 문장인 것 같다. 답답한 도시 생활을 벗어나 공원으로 자주 탈출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공감하는 글귀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책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일산 호수공원은 나에게 가장 편안한 휴식의 장소다. 모스크바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도 고리키 공원을 거의 매일 2시간씩 걷곤 했다. 그렇게 공원을 걷다보면 복잡하던 머릿속이 어느새 차분해지는 걸 경험한다.

도시의 삶은 우리를 알게 모르게 숨막히게 한다. 구조상 그렇다. 이런 도시의 삶에서 공원은 우리에게 큰 쉼이 된다. 그런데 도시공원은 19세기에 접어들어서 본격적으로 생긴 근대 도시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가 낳은 여러 사회 문제 즉 인구 폭증과 과밀, 빈부 격차와 노동자의 여가 공간 부족, 위생 악화와 전염병 유행을 치유하는 공간적 해독제의 목적으로 만들어졌다.(p.162)

우리는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공원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공원이 실제로 해독제의 역할을 했음을 경험했다. 공원은 집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처럼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뉴욕 센트럴파크의 설계자, 도시 사상가, 사회 개혁가인 옴스테드의 공원론이 잠깐 언급된다. 옴스테드는 공원이 열악한 도시 위생을 개선하고 시민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공원이 “도심에서 자연으로 최단 시간 내 탈출”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비전을 펼쳤다. 그리고 현재 이런 옴스테드의 공원론을 재해석한 많은 전시, 학술대회 등의 시도가 있다고 한다. 도시공원의 중요성과 효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책에는 공원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도 실려있다. <도시를 느리게 걷기>라는 꼭지에는 걷기를 좋아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도시와 조경 전공인 교수님에게는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며 구경하는 게 ‘일’이기 때문에 속도, 효율, 성과를 의식하느라 힘에 부치고 즐겁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걷기의 매력을 깨달은 순간 일상 속에서 소박한 걷기 습관이 생겼다.

바로 다음 꼭지인 <도시에서 길을 잃다>에서는 길을 잃는 기쁨에 대해 말한다. 어느새 몸의 일부가 된 스마트폰 때문에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즉 ’미지의 땅‘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모든 곳이 파악되고, 모든 동선은 효율성에 따라 계산된다. 그러나 우리는 내심 계속해서 길을 잃기 원하며 그로 인한 세상에서의 경이를 발견하기 원한다. “세상의 모든 경이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p.274) 그렇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내가 또다시 걷기의 즐거움, 길잃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자발적 표류, 자발적 길 잃기를 허락하기 위해 이번 주말은 어디로든 공원으로 떠나야겠다. 답답하고 생각이 복잡해지기 쉬운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이프 타임, 생체시계의 비밀 - 수면, 건강, 삶에 혁명을 불러오는 최적의 시간을 찾아서
러셀 포스터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왜 쉬어도 늘 피곤한가?”라는 문장을 보고 선택하게 된 책이다. 생체시계와 수면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과 양질의 수면을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다. 책 자체는 두껍지만 각각 분량이 많지 않은 14개 챕터로 나뉘어 있어 부담은 없었다. TED 880만 뷰를 달성한 강연자의 책답게 내용도 쉽고 재미있다. Q/A와 자신의 생체시계(크로노타입)을 알 수 있는 부록까지 알차게 수록되어 있다.



여러 연구와 실험 결과, 과학적인 사실들에 대한 설명은 직접 책을 읽어보는 게 좋다. 잠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디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생체리듬이라는 신생 과학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과학을 자신의 건강, 행복, 안녕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p.26.)는 저자 러셀 포스터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내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적용하고 싶었던 부분을 추려 써보려고 한다.


/


바쁘지 않으면 불안해서 이것저것 욱여넣는 일상이 디폴트 값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최근 한 선배는 네가 물컵이라면 넘치기 직전의 찰랑거리는 상태인 것 같다고, 물을 좀 덜어내라는 조언을 건넸다. 실제로 지금 나는 대학생 때와 다름없이 잠을 줄여 할 일을 해나가고 있다. 가족에게, 연인에게, 그 밖에도 내가 속한 여러 곳에 책임을 다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맡은 일들을 꽤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가장 먼저 잠을 포기한다.



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위의 문항을 읽고 한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길. 지금 나는 최소 6개가 해당된다. 사실상 매일 피로감에 시달리는 상태인지라, 정도가 약하긴 해도 짜증, 공감 능력 저하, 충동적 행동, 불안 등의 감정을 자주 맞닥뜨린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내 생체리듬을 알지 못한 채 여러 요구에 맞추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에 맞추고 일을 열심히 하면서 가정의 화목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잠을 줄이는 게 가장 간편하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잠을 줄이면 무리 없이 이 모든 것을 소화해낼 수 있을까? 이미 생활 속에서 여러 번 경험해 봤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 당장은 둘 다 잘 해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축적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는 격이다.


자는 동안 우리 몸에서는 다양한 회복이 일어난다. 대사 경로의 회복, 부정적인 감정 처리, 뇌의 정보 저장 등 수행 능력과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다양한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한다. 집중력, 기억력, 판단력은 충분한 수면을 통해 회복된다. 반면 수면에 문제가 생기면 일주기 리듬이 교란되어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많은 비극적인 사건은 수면 부족으로 일어난다. 교통사고, 원전 사고, 해양 기름 유출 등의 여러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이뿐인가, 수면 부족으로 인한 불쾌감과 능률 저하는 일상에서도 자주 경험한다. 부족한 수면이 가져오는 결과는 아래의 표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수면을 방해하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아무래도 스트레스 부분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SCRD(수면 및 일주기 리듬 교란)이 계속될 경우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의 수치가 상승하면서 삶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이게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결국 수면을 방해하는 되먹임 고리가 발생한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코르티솔이 분비되는 이유는 몸을 투쟁-도피의 반응을 하도록 준비 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상태는 위급한 상황에 도움이 되지만 문제는 장기적 스트레스 상황이다. 응급상황에서 발동되는 이 투쟁-도피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 몸은 계속해서 위기 상태라는 신호를 보내지만 그 상태로 살아가다가는 결국 어딘가 고장 난다. 책에서는 이를 기어 1단으로 계속 달리다가 엔진이 고장 나는 것에 비유했다.


수면에 대한 인식 전환에 대해 저자의 재치 있는 의견이 마음에 들었다. 교육을 통해 흡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 이제 흡연자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처럼, 수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거다. 밤샘근무나 잠을 줄여 공부했다는 것이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라, 도리어 경멸의 대상이 되는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제 내게 갓생은 이것저것 모두 챙기기 위해 잠을 포기하는 삶이 아니라, 좋은 잠을 자서 좋은 컨디션으로 내가 할 일을 수행하는 삶이다. 잠을 포기해가면서까지 무언가를 하는 건, 정말 긴급할 때가 아니고서야 최대한 피하는 무리하지 않는 일상을 살아가고 싶다.



좋은 잠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위의 도표를 참고하면 된다. 각 항목에 대한 설명은 책에 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루틴을 지키려는 강박에 사로잡히면 또 안되겠지만,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항목들은 적용해 보려고 한다. 지금 내게 필요하면서도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은 아침 빛을 많이 쬔다거나, 자기 전에 걱정이나 부정적인 생각보다 기분 좋았던 일, 감사한 일들을 떠올리는 거다. 삶을 전부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상황에 따라 매일 충분한 잠을 자는 건 불가능할지 몰라도 이제는 몸이 계속 위기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 상태를 진단하고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인지하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의 간극은 꽤 크다.


일주기 리듬을 회복했을 때 더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잠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더 좋은 잠을 위해 기꺼이 노력할 수 있다. 또 진심으로 주변 사람을 위한다면 더더욱 잘 자야 한다. 그러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잠을 푹 잤으면 한다는, 그게 자신의 사랑이라는 아이유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 마음을 담아 <밤편지>의 가사를 썼다고 했다.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는 친구, 공부나 취준 등으로 잠을 줄이고 있을 수많은 주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아끼는 모든 이의 단잠을 바라본다.


--------------------------------------------------------

📌그밖에 좋았던 내용 정리


-일주기 리듬은 ‘빛’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빛을 감지하지 못할 경우 일주기 리듬에 혼란이 와 수면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새벽과 저녁 빛이 중요한데, 아침 빛은 생체시계를 앞당기고, 저녁 빛은 늦춘다. 아침에 충분한 빛을 쬐지 못할 경우 상대적으로 저녁 빛을 많이 받아 생체시계가 늦춰진다. 결과적으로 취침 시간이 늦어져 또 피곤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 취침 전 전자기기 사용이 블루 스크린 때문이 아니라 뇌를 각성시키는 행동 때문에 좋지 않다는 사실. 앞서 말했듯 수면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빛’이다. 전자책과 종이책을 가지고 수면 실험을 해본 결과, 전자책에서 방출되는 빛은 31럭스, 책은 1럭스 정도였는데,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10분 미만으로 늦춰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스마트폰 사용 등으로 각성되는 뇌다. 늦은 시간에 컴퓨터 게임, 이메일, 소셜미디어 활동을 할 경우 뇌가 각성되어 수면에 지장이 생기고, 이로 인해 다음 날 피로로 인해 수행능력이 저하된다는 거다. (p.91.)


일주기 조절에 영향을 주는 빛은 최소 100럭스 이상이고 야간 근무자들에게 유의미한 생체 시계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5000럭스의 빛이다. 그러니까 결국 새벽/저녁의 빛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빛은 정말 신비롭다. 우리의 수면에 이토록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니. 생활패턴상 대부분 실내에 있어 햇볕을 쬐는 시간이 적은데, 조금이라도 빛에 노출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잠은 스위치가 꺼져있는 상태가 아니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태다. 한 번도 깨지 않는 통잠이 가장 좋은 수면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수면 도중 두 번 이상 깰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번 각성하는 다상 수면도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무엇보다 밤에 깨어났다고 해서 수면이 끝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잠들기 위해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SNS를 보는 등 뇌를 각성시키는 행동만 피한다면 금세 다시 잠을 잘 수 있다.


-아침형 인간은 인구의 고작(혹은 무려) 10퍼센트라고 한다! 위안이 되는 이야기다. 한동안 미라클 모닝 열풍이 불면서 도전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 살짝 절망했기 때문이다.


-밤에는 면역력이 떨어진다. 이 또한 생체 리듬과 관련 있다. 사회 활동을 많이 하고 타인과의 접촉이 잦은 때에는 감염의 확률이 높기 때문에 면역 체계가 활성화되어 있지만 밤에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책에서는 그 이유를 면역계가 24시간 작동될 경우 사이토카인 폭풍과 같은 과도한 면역 반응에 대한 위험을 막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밤에 근무하는 직종은 위생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겠구나 싶었다. 물론 밤샘 근무하는 직종이 없어지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절반 정도 읽었을 때야 표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책에 따르면 나의 익숙한 시각적 경험에 근거해 뇌가 잘못 판단한 결과다. 이 책은 철학, 진화론, 심리학, 신경과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넘나들며 조목조목 인간이 가진 합리성에 대한 환상을 부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혹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꽤 괜찮은 합리적인 인간으로 스스로를 규정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가 비합리적 선택을 한다. 당장 일찍 잠들어야 내일 할 일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기어코 늦게 자는 나부터도 그렇다.



책은 사례로 시작해서 처음부터 망상과 인식적 비합리성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다음으로는 이러한 비합리성 혹은 망상이 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지 다양한 학문에 근거하여 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다.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모든 확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사실 또한 지적한다. 많은 이론과 실험에 근거하여 저자는 '모든 확신은 가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대화를 해나가야 하는 이유로 연결지어서 좋았다.

비합리적 확신을 갖는 경향은 시스템상의 결함도, 맹장처럼 쓸모없는 것도, 부수 현상도 아니다. 이것은 뇌의 아주 ‘정상적인’ 기능 방식의 결과다. “버그가 아니라 특성이다.”

p.296.


내가 알고 또 믿고 있던 세계가 일순간에 뒤바뀐다면 패닉에 빠진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통제 상실감을 겪고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세계를 예측 가능한 곳, 통제 가능한 곳으로 바꾸기 원한다. 인식적 비합리성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비합리성이 주는 효용(삶에 대한 통제감, 좋은 느낌)이 크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내고 여러 모순적인 일들을 잇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는 '세계를 만든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론적으로 설명하자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인식적 비합리성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에 대한 지식이 진실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해서 크게 놀라는 편이 실제 뱀이었을 경우 당할 피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내용이다. 이렇게 우리 모든 사람은 뇌의 정상적인 기능에 따라 비합리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물론 이 중에서도 극단적인 편에 속해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망상증은 구분해야 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코로나 19 상황과 그로 인해 빠르게 심화되는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마주하며 '모두에게 어느정도 비합리적인 확신이 있으니 그냥 그렇게 살자'라는 말은 더이상 통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균열의 골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건설적인 대화를 해야 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대화를 위해 이 책이 도움이 된다. 확신은 원칙적으로 가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다른 사람의 확신에 대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열린 마음을 갖게 한다.



도식, 이미지 같이 시각 자료가 곳곳에 삽입되어 있어 이해를 도왔다. 특히 위쪽 이미지는 뇌의 예측 위계질서를 도식화 한 것인데 이 부분이 아주 흥미로웠다. 감각 데이터가 쏟아지고 그 데이터가 기존의 경험과는 차이가 있어 낮은 위계의 지각적 예측으로 처리할 수 없을 때 보다 높은 위계에 속한 인지적 예측(확신)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이라고 한다. 뇌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밖에도 다양하지만, 적어도 망상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 이론이 매우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덕분에 조현병 환자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조현병 환자들은 갑자기 주변의 자극이 낯설게 느껴져 정상인에 비해 지각적 예측 능력이 낮다. 따라서 인지적 예측에 더욱 의존하게 되어 확신이 더욱 강하게 발현되고 망상에 갇히는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여러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설명하는 만큼 '책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딱딱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은 당장 버려도 좋다. 조금은 지루하게 느낄 수 있을 법한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렇게 재치있게 풀어낸다. 책 곳곳에서 저자의 유쾌함을 발견할 수 있어 즐거웠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 원하는 'T'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어떻게 확신을 고집하는 사람과 좋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다루는 책은 아니기에 건설적인 대화 방법에 대해 알고 싶다면 『타인을 읽는 말』, 『인간관계론』 등이 더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확신'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단초를 마련해주는 책으로,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득력 높은 가설로서의 확신(p.316.)이 담긴 책이니 꼭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는 확신을 바꾸는 것을 유약함의 표시라고 느낀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뒤흔들고, 새로운 증거로 인해 확신이 계속하여 ‘흔들리게끔’ 하는 것은 사실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p.327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로마 신화 신박한 정리 - 한 권으로 정리한 신들의 역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름 동안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소포클레스의 작품과 《일리아스》를 읽었다. 내용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등장하는 인물과 신들이 워낙 많은데다 이들의 관계가 워낙 복잡해서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책 뒤쪽에 주요 인명/신명, 가계도 등의 내용이 부록으로 실려 있었지만 읽어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아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린 시절 읽은 만화책이 전부인터라, 몇 가지 일화만 드문드문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이유로 이번 달 도서 목록에 그리스 로마 신화 신박한 정리가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저자 박영규는 대중 역사 저술가로,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를 통해 밀리언셀러 실록사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이 외에도 30여권이 넘는 역사서를 집필하며 꾸준히 다작을 해왔다. 방대한 역사를 간결하고 쉽게 풀어내는 작업을 계속 해온 분의 책 답게, 방대한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문장이 깔끔하고 간결해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


등장인물=제우스의 형제자매 및 여인들과 자녀들+제우스의 후손이 세운 왕가의 주요 인물+민간 전설 속 인물과 괴물

들어가며/ p.13.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물 구성이 무척 단조롭다고 썼는데, 잘 정리되어 있긴 해도 사실 너무 많은 인물과 낯설고 긴 명칭 때문에 여전히 복잡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의 큰 장점은 각 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인데, 인물 이름이 반복 등장하다 보니 그저 읽다 보면 힘들이지 않고도 낯설었던 이름들이 친숙해진다. 책장을 덮고 나서 분명 복잡한데 단순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보다 더 쉽고 간명한 이해를 위해 책 구성에 많은 노력을 들인 것 같았다. 인물들의 경우 각 인물 별로, 문단 별로 간결한 소제목이 달려있어 이해를 돕는다. 특히 2장 [제우스의 여인들]의 경우 인물의 이름 아래에 자녀 수와 이름을 함께 표시해 두어 쉽게 인물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했으며, 3장 [제우스의 아들들]의 경우 각 인물의 특징 및 주요 사건을 소제목으로 달아 두어 굵직한 글씨만 읽어도 어느 정도 인물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게 구성해 두었다. 또 5장 [제우스 후손이 이룬 그리스 왕가 이야기]에서는 헷갈리는 왕위 계승도를 설명에 앞서 표로 먼저 정리해줌으로써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장들은 아무래도 6장 [아르고호 원정대]와 7장 [트로이 전쟁 이야기], 9장 [그리스 로마 신화를 쓴 주요 작가 및 작품]이었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를 인상깊게 읽으며 메데이아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비극에서는 이아손과 코린토스로 도주한 후의 이야기부터 시작되기에 전사를 알지 못했다. 해당 장을 통해 이아손이 전보다 더 괘씸해졌으며(ㅎㅎ) 비극 속 내용 전후의 삶까지 알게 되어 좋았다. 또 7장 <트로이 전쟁 이야기>와 9장 중 호메로스를 다룬 부분을 통해 《일리아스》가 보다 명쾌하게 정리되었다. 10년의 트로이 전쟁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 상태에서 《일리아스》 줄거리를 다시 보니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이 이해되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중 마지막 해의 51일간 일어난 사건을 서술한 작품이다./ p.286.)


책에 써있듯 서양 문화를 구성하는 두 축은 히브리즘과 헬레니즘으로, 헬레니즘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반으로 한다. 식물의 이름, 다양한 나라의 지명뿐만 아니라 각종 용어의 어원에서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다양한 예술과 학문 분야에서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발견한다. 따라서 신화를 알면 내 눈에 들어오는 세계가 더 넓어진다. 살면서 한번쯤 정리해두면 좋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왕이면 재밌게 읽고 싶은 분들, 많은 시간을 들이기 부담스럽고 신화의 내용을 전체적인 그림으로 파악하기 어려워 멀리하던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계도가 헷갈리거나 문학 작품을 읽는 중에 알듯 모를 듯 한 신화 속 인물이 등장할 때 언제든 꺼내어 볼 책이다. 이토록 단순 명쾌하고도 탄탄한 설명이라니, 저자분께 고마워지는 책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 - 분노는 내려놓고 사랑을 취하라
박주정 지음 / 김영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조하고 퍽퍽한 일상에 커튼을 확 열어젖혀 밝은 햇살을 쬐어주는 듯하다. 학교판 『지연된 정의』 느낌인데, 드라마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 실려 있다. 희망을 잃어가는 때에 꼭 필요한 책이다.



나의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라 동행이었다.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였다. 침침한 교실에서, 벌판이나 강가에서, 경찰서나 재판정에서 늘 아픈 아이와 함께했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부모와 휘청거리는 조부모와 함께 있었다.

p.6. 서문 발췌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일이 점점 어색해지는 요즘이다. 무의식 중에 모든 걸 자원으로 여기며 시간, 에너지, 돈을 타인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끌려 간다. 그런데 박주정 선생님은 다르다.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기꺼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다해 아이들을 돌본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닐까? 이토록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대한 적이 있던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

  늘 아이들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는 선생님의 교육관은 '동행'이다. 학생과 선생님의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가족에 가깝다. 단순히 측은하게 여기는 동정심으로 다가가는 것도 아니다. 한 아이를 향한 사랑이 바탕이 된다. 필요하면 함께 술도 마셔주고, 담배를 피기도 한다. 누군가가 들으면 이렇게까지 한다고? 라는 말을 들을 법한 행동이다. 그저 단순한 밥벌이로만 생각한다면 절대 지속할 수 없다.


단지 이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내 삶이 완전하게 느껴졌다. 평안하게 온전해졌다. 그것뿐이었다. ‘나처럼 굶지 않게 하리라, 비바람을 피할 따뜻한 방을 주리라’

p.98.

  

   이렇게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일 할 수 있기까지 박주정 선생님도 많은 굴곡을 겪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이유모를 폭행을 당하고 집에 울면서 돌아온 그를 위해 선생님을 만나겠다고 나갔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어릴 때부터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의 아픔을 더 품을 수 있었으리라. '분노는 내려놓고 사랑을 취하라'는 표지에 쓰인 문구가 박주정 선생님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들뜬 마음을 가지고 사회인의 발걸음을 내딛은 광주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뼈아픈 실패를 겪는다. 학생들은 선생님에 대한 일말의 존경도 보이지 않는다. 낙담하고 퇴사를 결심하지만, 생활의 문제로 다시 교직에 복귀한다. 거짓말처럼 바로 그 문제의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시 배정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어떤 변화를 일으킬 생각없이 그저 적응하기 바빴던 어느 날, 8명의 학생이 집으로 난데없이 찾아왔다.

  담배 냄새, 술 냄새를 풍기며 아무렇지 않게 박주정 선생님 집 거실을 점령하더니 하루이틀도 아니고 계속해서 찾아온다. 한달 정도 희한한 동거를 하고 나니 아이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함께 공부한 결과 전교 1등부터 7등까지가 박주정 선생님 거실 출신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의 관심과 스스로 일군 성취감은 꿈을 품게 했고 삶에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게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멤버 교체라면서 다른 문제아들을 다시 거실로 들여보낸다.

  열 평짜리 아파트에서 이를 지속하기는 어려워 광주 근교에 집을 구해 공동학습장을 만든다. 아이들과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경험한다. 물론 모든 날이 순조로울 수는 없다. 비가 퍼붓는 날 한 아이를 찾으러 오밤중에 돌아다니기도 하고, 마음을 열지 않는 학생 곁에서 새벽 4시까지 가만히 앉아있기도 한다. 아이들은 박주정 선생님의 진심 어린 마음을 알고 조금씩 마음을 열어놓는다. 8명의 아이들은 어느덧 707명의 아이들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장학사로 선발되며 한 지역의 아이들 모두를 품어낸다. 더 많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잘하는 아이들보다 항상 못하는 쪽, 힘든 쪽의 아이들 곁에 서있고 싶었다.

p.6. 서문에서 발췌


  법을 위반하지만 않으면 무엇이든 해보라는 적극 행정(p.280.)을 통해 박주정 선생님은 많은 새로운 일을 만들어냈다. 박주정 선생님은 학교부적응 중학생들을 위한 단기 위탁교육시설 '금란교실'을 만들고, 중도 탈락 학생을 복교시키고, 24시간 상시대기하는 위기학생 신속대응팀 '부르미'를 창설하는 등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다. 이중 다수가 전국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전국에 있는 Wee센터는 박주정 선생님의 금란교실을 벤치마킹하여 전국으로 확산된 케이스다.)

  수많은 학생의 사건사고를 보고 듣다보니 우울증도 앓게 되었다. 박주정 선생님을 거쳐간 많은 아이들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었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 학생 한 명 한 명이 박주정 선생님 마음에 짙은 아픔으로 남는다. 선생님의 삶은 많은 눈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한 명의 아이가 맑은 웃음을 짓는다면 '그 어려움들이 모두 행복한 추억으로 바뀐다'(p.326.)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선생님을 보며 사랑할 용기를 낸다.




아이들의 내면에는 무엇이든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 힘을 끌어내는 데는 어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약간의 도움만으로도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다. 아이들은 공동체의 미래다.

p.254.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