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혁명가 김원봉
허영만 지음 / 가디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지도 벌써 7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짧지 않은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공과가 아직까지 깔끔하게 정리는 되지 않은 것 같다.

​

허영만 화백의 주식 투자서 이후로 최근에 출간한 이 책이 바로 그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다루고 있다.


약산 김원봉!!

그동안은 활동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가 영화 암살, 밀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 같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였고,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총기 다루는 법과 폭탄 제조법을 익혔다. 그리고 뜻이 맞는 동지를 규합하여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

"자유와 독립은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열단원이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킵시다!

​

약관 22세의 나이에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동하였다니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이제 겨우 대학교 2,3학년 정도의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니 경외감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때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계셨지만 김원봉이 활동했던 의열단이 일제 입장에서 가장 눈에 가시 같던 존재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일제가 그에게 건 현상금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당시 그에게 걸린 현상금이 100만 원이었는데 현재 시세로는 무려 약 360억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의 현상금이 60만 원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그를 잡고 싶어 했는지 현상금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마 알 수 있다.


학창 시절 일제의 만행에 대해 많이 듣고 보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책에 붉게 처리된 사진들을 보며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야만적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보고 느끼게 되었다.



김원봉의 재조명이 이렇게 늦었던 이유가 해방 후 그가 북으로 갔기 때문이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 가지 사유로 북으로 가긴 했지만 일제 치하 그의 독립운동의 성과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폄하돼서는 안될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이렇게 음지에서 활동하셨던 독립투사들이 드러나고 재조명되는 일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정부나 기관의 주도하에 이러한 사업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중 갈등, 우방이라곤 하지만 일본과의 애매한 관계(특히나 몰염치하게 과거사 반성이 없는),

북핵 문제 등 작금의 현실은 구한 말의 그때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정세인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우리가 그때만큼 힘이 약하진 않다는 것이다. 그 힘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민족의 혼을 바탕으로 이 역경도 잘 헤쳐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지금 시대에서의 독립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기죽지 않고 우리 목소리를 떳떳하고 힘 있게 낼 수 있는 국력을 기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