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떨어뜨린 것 반올림 40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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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저지르는 가장 비열하고 끔찍한 일들은 대부분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졌다. 명령을 내린 자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명령에 따라 움직인 자는 명령이란 방패 아래 자신의 억눌린 사악함을 드러낸다. 혹은 명령이란 이름 뒤로 뻔뻔스레 숨는다. 명령을 통해 그들은 공생 관계가 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 넣어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스위치만 누른 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수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을 때리고, 찌르고, 죽인 것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고, 단지 명령에 의해 방망이를 내리치고, 대검을 찌르고, 총을 쏜 병사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명령이 방패가 되어줄 때 인간은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 있는 걸까? (p.22-3)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그 애는 바로 나였다. 내 속의 또 하나의 나, 내가 계속 무시해 온 아이, 남들만 보느라고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던 아이,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는 외로웠다. 나는 배려심이 깊고 착한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 모든 아이, 행복하고, 외롭지 않고, 배려심 깊고, 착한 아이도 역시 ‘나’였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만을 챙기느라 어둠 속의 저 애는 내팽개쳐 두었다. 얼마나 무시했으면 저렇게 저 애가 어둠을 뚫고 스스로 내 앞에 나올 생각을 다 했을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p.45)




저주 받은 영혼이다, 너는

그러나 잊어도 좋다, 그 사실을. 한 순간쯤은.


그까짓 말 한 마디가 무엇일까? 그런데도 나는 내 자신에게 허용한 그 작은 여유에 코끝이 시큰했다.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러나 한 순간쯤은 잊기도 할 것이다, 내가 저주 받은 존재라는 것을. (p.101)




K, 그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나는 이미 내민 발을 후회했다. 그랬으니 죽으려던 마음은 확실히 떨어뜨린 거였다. 그리고 운 좋게 이렇게 살아났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보다. 떨어뜨려야 할 게 더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날 허공에서도 미처 떨어뜨리지 못한 무엇인가를 조용히 떨어뜨리는 내 모습을 본다. 그게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것을 떨어뜨리는데 자꾸만 눈물이 흘러나올 뿐이다. (p.128)


책을 다 읽고 한 동안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안타깝게 희생된 박기현군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명령>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아무리 명령이라고는 하나 어떻게 아무 죄도 없는 국민들을 학살할 수 있는 것인지 지금도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무장을 하고 나타난 군인들에게 학살당한 아이는 고작 열다섯.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명령이라고는 하나 타당한 이유도 없이 아이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힘없는 어린 소년을 낚아채 두개골이 부셔져 다 가루가 될 정도로 때렸어야만 했었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는 말이 세상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연한 핑계에 불과하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 것인지. 명령을 거역하지 못 했다는 것은 그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과 결과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들이 떨어뜨린 것>은 청소년의 절망을 밀도 있게 그려낸 단편 소설집으로 현실의 무게와 들끓는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경계에서 이들은 어른이 규정한 울타리 안에서 숨 쉴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바로 그들의 답답한 현실과 생을 뒤흔드는 절망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삶과 죽음의 충격을 전하는 동시에 그러한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해 준다.


책은 학살 당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스스로 죽으려다 살아난 소년의 이야기로 끝나며 그 사이에, 행복한 척 하지만 사실은 외로운 소녀, 자신의 욕망을 이해받지 못해 슬픈 소녀, 신체적 괴로움으로 절망에 빠진 소녀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명령>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졸업을 앞 둔 제자들에게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에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군인들이 휘두른 진압봉에 두들겨 맞아 열여섯의 나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친구 기훈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 친구가 죽을 때 품에서 떨어뜨린 필승중학수학 때문에 수학선생님이 되었다는 주인공은 ‘역사는 결국 한 사람의 이름을 사무치게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며 마음에 깊은 의미를 새겨 준다.

<울고 있니, 너?>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고등학생 소미가 어느 날 어찌보면 사람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짐승같아 보이는 이상한 존재를 목격하며 그 애를 통해 자신이 감추어왔던 외로움과 슬픔을 발견하여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는 이야기다.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은 엄마와 소통이 되지 않아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청바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민하의 마음을 통해 청소년이 받는 억압과 외로운 심정을 담아냈다.

<저주의 책>에서는 간질을 앓고 있는 고등학생 규리가 등장해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을 때마다 공책을 펼쳐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저주의 힘으로 살아가던 규리가 삶을 묵묵히 견디며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떨어뜨린 것>은 이 책의 토대가 된 작품으로 단 한번도 자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석호가 충동적으로 죽으려고 뛰어내렸다가 실패하고 돌아와 자신이 진정으로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담아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저마다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자신의 몸을 허공에 던지거나 마음에 품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린다. <그가 떨어뜨린 것>의 석호는 죽으려던 마음을 떨어뜨려 살아났고, <명령>의 기훈은 수학 문제집을 떨어뜨려 친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울고 있니, 너?>의 소미, <그건 사랑이라고, 사랑>의 민하, <저주의 책>의 규리도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들이 떨어뜨린 것은 소중한 것도 있지만 버려야만 할 것도 있었다. 부디 여러분들이, 떨어뜨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들은 고이 간직하고, 떨어뜨려야 할 것들만 떨어뜨려 어려운 시기를 잘 버텨주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청소년들이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끝까지 붙들어 건강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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