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기계 - 신이 검을 하사한 자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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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의 손바닥에 빛나는 구슬 같은 생명이 느껴졌다.

쉽게는 안 된다. 아무리 다른 표현으로 바꾼들 결국은 죽이라는 뜻이니까 당연하다. 배 속이 묵직해지고 구역질이 났다.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버릴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전부 다 내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온몸에서 땀이 배어났다.

시간이 흐른다. 땀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마침내 생명의 빛을 깊은 우주로 살짝 밀어냈다.

노파는 잠에 빠지듯이 세상을 떠났다.

하루카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이었다. (p.30)

금색 존재는 아주 옛날부터 금색님이라는 이름으로 지내왔다. 현재의 두령인 한도 고키의 몇 대나 전부터 있었으므로 백 살은 가볍게 넘었겠지만, 인간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다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것이 뒷간에 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 밥을 먹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다. 남자지만 여자를 탐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하게 강해서 두령이건 구로후지건 힘으로는 아무도 당해낼 수 없다.

평소 서적을 즐겨 읽는다. 일단 잠에 빠지면 장식물처럼 똑같은 자세로 며칠이나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은 것은 아니므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움직인다고 한다. (p.88)


그녀는 동굴 속에서 그의 딱딱하고 차가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슴팍 안쪽.

번쩍번쩍 빛나고 고동치는 것을 찾아냈다.

그것을 양손으로 감쌌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스스로는 바람을 이룰 수 없다는 것도.

끝을 가져다주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그는 쉴 수 없다. (P.459-60)



마음만 먹으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 하루카. 그녀는 의사인​ 소노 신도의 딸로 일 년에 두세 번 아버지를 따라 별당이라고 불리는 산 속의 외딴 마을로 왕진을 갔다. 별당은 조금 특수한 산촌으로 마을 사람 대부분이 노인이었다. 왜냐하면 무카와무라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자진하여 별당으로 거쳐를 옮기고자 하는 노인이 많았기 때문. 그 곳에는 노인 외에도 병자와, 광산에서 사고를 당해 팔다리를 잃은 사람,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들어 와서 정착한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살았다. 한 마디로 조용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과 세상을 버린 자들이 은거하는 마을이었다.

하루카는 그 곳에서 아버지 신도의 명을 받들어 가망없는 노인들에게 안락한 죽음을 선사한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운 그녀의 일상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조카마치의 무가 저택에 환약을 전해주러 갔다가 자신을 해하려던 떠돌이 무사를 얼떨결에 죽이고 만 것이다. 신도의 허락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함께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은 하루카에게 큰 파문을 남긴다. 사흘간 고열로 고생하다 깨어나 하쓰에에게서 자신이 과거에 무참히 살해 당한 유민 무리의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존재에 회의감이 든 하루카는 신도와 약조를 어기고 가메를 죽였으니 이제 집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서찰을 남기고 무작정 집을 떠나 산 속에서 금색님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온 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진, 어떤 질문이든 답해준다는 절대적이고 신령한 존재.

그 와의 만남을 통해 하루카의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이 시작된다.

 

<금색기계>는 환상의 존재와 인간이 공존하는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범상치 않은 운명을 가진 사람들의 신비한 이야기로  하루카라는 여자가 유녀와 면담하는 자리를 이용해 강가 일대 큰 유곽의 주인인 구마고로와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되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 인물들의 삶을 차례로 보여주면서 각기 다른 형태로 이어지다가 후반부에 가까워질수록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손을 가진 하루카, 타인의 살의를 볼 수 있는 구마고로, 충격적인 비밀을 안고 있는 유능한 도신 겐신,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며 신으로 칭송받는 불가사의한 존재 금색님까지 이들은 오래 전 산촌에서 발생한 유민 살해사건을 중심으로 거미줄 마냥 서로 얽혀 있다.


그들은  저마다 살기 위해 선과 악을 오가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루카는 처음 자신의 힘을 잘 모르고 고양이를 죽인 것을 몹시 후회하며 신도가 시키는대로 그 힘을 봉인했다. 하지만 신도의 허락아래 심한 통증으로 손쓸 방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능력을 사용하여 그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편히 보내드리는 일이 ‘세상의 선악을 구분하건데 남이 기뻐하고 바라는 일을 해주는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악이야.’라는 아버지의 말에 하루카에게 죽음은 더이상 악이 아니었다. 죽음은 마땅히 다다라야 할 종착점이며, 고통이 오히려 악이었다. 하루카는 고통스러워하는 자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그것은 전혀 특별한 힘이 아니다.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다. 물에 적신 천으로 코와 입을 막아서 질식시키면 된다. 하지만 하루카의 손에 죽는 사람은 고통에서 해방되어 꿈과 환상에 감싸인 채 편히 죽는다. 안락함이 크게 다르다.​ 아버지는 살릴 수 있는 환자에게 약을 팔아 삶을 선사하고 자신은 살릴 수 없는 환자에게 안락한 죽음을 선사한다.

구마고로는 자기를 죽이려는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위험에 처해왔지만 신기하리 만치 예리한 감이 그를 구했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점치는 힘은 없지만 살의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사람이 접근하면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그가 아버지에게서 달아나 산 속에서 길을 헤매다 운좋게 사람들을 만나 살기위해 따라간 곳은 산적들의 특수한 보금자리인 극락원. 산적 패거리들에게 거두어진 구마고로는 그 곳을 함부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그야말로 살기 위해서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시키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산적들은 의뢰를 받아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고 이따금 산 아래 마을에서 여자아이를 납치해 온다. 납치된 여자아이는 극락원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식사와 예쁜 옷을 제공받으며 때가 오면 그들의 여자가 된다. 어찌보면 참 나쁜 일만을 일삼는 것 같지만 그 부근 마을사람들에겐 단단한 신뢰를 받고 있다. 몰래 논밭을 관리하며 혹독한 조세와 대책 없는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이 비밀 논밭에서 수확되는 쌀과 작물을 나누어주었던 것. 그래서 구마고로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더욱 인정받고 싶었다. 나름 정의롭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죄인. 관헌들이 들이닥치면 죄다 사형이다.

올바름이란 무엇일까. 그들의 삶에서 악이 무엇인지 따져보자면 나쁜 건 그들 뿐만이 아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채우려는 막부도 번도 전부 다 악일 수밖에 없다. 남의 정의에 휘둘러 죽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여그들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에게 옳고 그름은 무의미했다.


​환상적인 세계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작가 쓰네카와 고타로는 에도시대를 그려낸 이번 작품으로 미스터리 분야의 최고 권위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완전히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알 수 없는 금색님의 정체, 유민들을 살해한 범인, 그리고 때때로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는 소녀들의 행방 등 이야기는 각 인물들의 기묘한 운명을 흡입력있게 드러내며 감추어져 있는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금색님의 정체는 이 소설의 가장 놀라운 부분 중 하나. 처음 제목을 보고 왜 금색기계인지 의아해 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절로 수긍이 된다. 금색님은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들의 삶에 알게 모르게 깊숙히 관여되어 있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세상은 개성적인 등장 인물과 흥미로운 사건들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며 463페이지에 달하는 제법 두꺼운 책임에도 전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쩜 스토리가 이렇게나 탄탄한지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오히려 더 집중해서 읽을 정도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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