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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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노라, 보았노라, 겪었노라, 돌아왔노라!”

<열하일기>보다 유쾌하고 통쾌한 여행기

 

 

 

 

 

 

​마침내 통신사가 떠나는 날이었다. 동틀 무렵 세 사신이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임금(영조)은 숭현문 장막 안에 있었다. 임금은 칠순 연세가 무색하게 우렁찼다.

“교린은 중대한 일이다. 그대들의 임무가 막중하다. 하릴없이 왜국 새 관백 승통이나 축하해주고 올 일이 아니다. 우리 조선의 강력함을 주지시킬 것이며, 왜국의 사정을 속속들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일전에도 누누리 일렀으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삼사는 입을 모아 말했다. “명심하겠나이다.”

임금은 단호히 명했다. “약조를 어기고 조정에 수치를 끼치는 자, 기이하고 교묘한 물건을 사서 은밀히 이익을 노리는 자, 저들과 술을 마시어 감히 나라의 법금을 어기는 자는 너희가 먼저 목을 베어라. 목숨에 인정을 두지 마라.”

임금이 문득 글귀를 외웠다.

二陵松柏不生枝(이릉송백불생지) 두 능침 송백나무 가지가 있나 없나.


조엄도 잘 아는 글귀였다. 윤안성이, 정유재란 후 평화교섭차 왜국 가는 사신에게 써준 글귀란다. 성종·중종 두 임금의 묘를 파헤친 도적놈도 못 잡은 상황에서 무슨 교린이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토한 절규였다고.

임금이 하교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이 글귀를 외웠겠는가. 외교란 잔인한 것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 적국이라도,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사귈 수밖에 없는 것이니라. 너희 또한 왜국 가는 마음이 오죽이나 불편하겠느냐? 허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애써다오.”

임금은 친히 붓을 들어 세 장의 종이에 똑같이 네 글자씩 썼다.

好往好來(호왕호래)


조엄은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가 퍽이나 감격스러웠다. 늘 늙은 호랑이처럼 무섭던 임금이 이런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임금은 오랫동안 서서 세 사신의 멀어져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이 책은 조일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제 11차 통신사를 다룬 소설이다.

​1763년 8월 3일, 조일전쟁 이후 제 11차 통신사가 서울을 떠났다. 영조 39년이었고 계미년이었다. 일본 에도(현재 도쿄)에 닿은 것은 이듬해 2월 16일. 돌아와 경희궁에 복명한 것은 1764년 7월 8일. 332일이 걸렸다.

흔히 계미통신사, 계미사행, 시쳇말로는 고구마 통신사로 회자되었는데 그 때를 각별한 기록자가 십수 명이었다. 정사 조엄의 해사일기, 제술관 남옥의 일관기, 서기 성대중의 일본록, 서기 원중거의 승사록, 명무군관 민혜수의 사록, 한학상통사 오대령의 명사록, 선장 변탁의 계미수사록, 한학압물통사 이언진의 해람편, 서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 그들이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나타낸 기록물들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언문 기록도 있었다. 종놈 삽사리가 하루에 한 명 이상씩 동류와 소통하며 낱낱이 적은 대화록, 격군 중에 추상우가 이따금 이모저모를 글로 간단히 적어둔 기록, 역시 격군인 김국창이 별의별 것을 다 적어놓은 책, 소동 중 임취빈이 쓴 운문일기와 죽은 사람에게 지어준 행장.

위 모든 기록을 낱낱이 상고하여, 하나로 꾸민 것이 바로 이 책 <조선 통신사>이다.

온갖 잡다한 오백 가량의 사내가 삼백여 일 동안 일만 리 먼 길을 다녀오며 동고동락한 이야기.


통신사 세 사신이 처음 정해진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수차례 바뀌다가 확정된 것이 불과 두 달 전. 통신사의 윗사람은 한양 조정에서 결정했지만, 아랫사람 수백 인의 차출은 동래부사, 경상좌수사, 부산참사 이들 셋에게 달린 바였다. 지난해 여름(1762년 8월) 인원 선발을 마무리했다. 이전에 정해진 종행자는 격군에 이르기까지 한 명도 바꾸지 말라는 어명이 있었지만 윗사람이 툭하면 바뀌는 탓에 죽을병으로 누워 있는 자, 죄를 지어 숨어 버린 자와 옥에 갚혀있는 자,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자, 신분이 수상한 자 등 피치 못할 결원이 생겼다. 여섯 척의 배를 부릴 선장은 무탈했지만 사공과 격군은 결손이 워낙 심각했다. 사공은 열 명 이상, 격군은 백 명 정도 새로 뽑아야 하는 인원은 절반이나 되었다.

널리 방을 붙이니 사공, 격공 취재 보는 날, 동래읍성에는 만 명이 넘는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소문에 소문이 더해져 죽을지도 모르는 길이 무슨 커다란 행운수라도 되는 줄 알고 응시하러 온 이가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세 사신으로부터 종놈들에 이르기까지 태반이 황당하게 불가피하게 느닷없이 왜국에 갈 사람으로 채택되었다.

청나라 연경에는 뇌물을 써서라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지만, 왜국은 누가 황금을 준다고 해도 선뜻 가겠다고 나서기 두려운 곳이다. 태풍 한 번에 황천길로 떠날 수도 있는 바닷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시나브로 심해지더니 배가 기우뚱기우뚱 삐걱삐걱 울었다. 촛불이 사납게 흔들리고 작고 가벼운 것들이 굴러다녔다.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혼절 지경이었다. 바다는 진정되지 않았고 한껏 기승을 부렸다. 처음 배를 타보는 자들은 저승 문턱에서 좌충우돌하는 듯했다.


책을 펼치자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로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재미난 구경거리에 빠진 사람 마냥 홀린 듯이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조선의 오백사내,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그들의 진짜 이야기가 펼쳐진다.

​조선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에서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되었던 공식적인 외교사절이었다. 이들의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 뒤, 부산에서 여섯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대마도를 거쳐 각 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에 상륙하여 육로로 도쿄까지 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책은 이역 만리의 긴 여정을 따라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의 풍속, 외교임무의 수행과정 등을 소상히 기록하며 전 과정들을 다양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아내어 마치 역사속으로 여행을 떠난 듯하다. 그리고 저마다 비장한 각오로 떠나는 이들의 모습은 전장에 나가는 군과 같다. 윗사람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으나 아랫사람들은 하나같이 병약한 어머니와 아우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임하는 길이다.


오합지졸을 모아놓은 까닭에 떠나기 전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이들이 떠나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다. 역사적으로 통신사 행차는 폐단이 극심했다고 한다. 그들을 받아들인 고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려면 오죽 했으랴 그들이 지나간 고을은 한바탕 전쟁을 치른 것 같았을 것이다. 그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대만 다를 뿐이지 지금의 우리와 똑같이 닮아 있다. 한강 강나루를 떠나 용인과 충주를 거쳐 동래에 이르기까지 윗분들의 행동은 정말 혀를 두를 정도다. 각 지방에서 기생이란 기생은 다 끌어모아 윗분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향락에 빠져 허허거리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 온갖 꼼수를 부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손에 쥐고 모든 것을 취하려는 그들의 욕구는 정말이지 끝이 없다. 반면 아랫사람들은 죽기살기로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간다. 테스트를 통과해 어떻게든 뽑히려는 그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일기를 쓰듯 적어 내려간 하루하루는 여러 사람의 일기를 묶어 한 권으로 만들어 놓은 듯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의 입담은 정말 대단하다. 만능이야기꾼 같다. 시작부터 작정하고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겹쳐지는 이없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각자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허구의 소설임에도 마치 정말 역사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같다. 덕분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 스스로 반짝반짝 빛이 나고 너나 할것 없이 모두가 주인공처럼 여겨진다. 특히나 이들의 이야기는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어느 곳에서도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없기에 더 재미있고 그래서 책이 제법 두꺼운데도 불구하고 꺼리낌없이 읽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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