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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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이의 지위에 맞춰 호 아줌마와 나는 네개의 화덕을 부리며 어젯밤 만들어놓은 음식을 데우고 간이 적당히 스민 채소류와 푹익힌 육류와 매운 육수, 젓갈 등으로 맛을 낸 탕과 중간중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전병과 각종 양념들을 챙긴다. 이 모든 동작은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않고 진행된다. 누가 봐도 장교식당 주방에 완벽하게 적응한 충성스러운 요리사의 모습이다. 나는 기죽지 않는다. 화덕 앞에 나의 도마가 굳건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알까? 어제저녁, 나는 내 목숨을 걸고 요리했다. 무대의 막이 오르면 나의 요리들은 거침없이 진격할 것이다. 더는 저들의 창검 따위에 눈을 아래로 떨구는 겁쟁이가 아닌 것이다.

(p.156)

​아버지를 잃고 요리사가 되기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혁명전선으로 달려가 전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런 그의 젊은 혈기를 잠재운 건 바로 도마였다. 도마는 그에게 피를 흘리지 않고 싸우는 법을 알려주었다.

자신들이 쥐어준 칼이 도마라는 치열한 전장을 거쳐 도로 자신들의 심장을 겨눌 줄 그들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들의 펄떡이는 생명을 끊어놓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삶 아니면 죽음,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도마였다.

 

​2017년 혼불문학상의 본심 경연에 초대된 작품은 모두 6편이었다. 6편 모두 본심의 무대에 오를 만한 일가를 이룬 작품들이었으나 당선작을 결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 한 작품이 홀로 빛나고 있었고 심사위원들은 그저 지목하면 되었다. 그걸로 심사는 끝이었다. 7년 만의 심사위원 만장일치를 받은 제 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칼과 혀>

두꺼운 책과는 상관없이 단숨에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책장은 소리없이 서둘러 넘어가기 시작한다. 그만큼 저자의 필력에 압도되어 막힘이 없다.

칼과 혀는 특이하게 만주국 그것도 패망 직전의 만주국을 배경으로 한다.
제 19대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모리). 그의 정식 직함과 이름이나 이런 형식으로 불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거대한 제국의 허울 좋은 주인이자 공포와 비명을 감춘 천수각의 성주, 그리고 매끼 맛깔나는 음식에 목말라하는 요리애호가이며 예술비평가다. 시멘트 냄새 풍기는 사령부를 벗어나 거리의 이름난 음식점들을 순회하길 좋아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당시만해도 꿈은 교단에서 정년까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을 정도로 전쟁과 전혀 어울리는 인간이 아니다.

천재 중국인 요리사 왕첸. 아버지를 광둥 제일의 요리사로 둔 덕에 어려서부터 이족과 광둥요리를 두루 익혔다. 만주로 온 이후에는 한때 일본인 식당에서 메밀 요리를 배웠고, 광동군 사령부 장교 식당 주방에 머물던 때는 만주 여인을 통해 만족 전통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그전에 관둥에 있을 때는 조선 처녀와 인연을 맺어 조선요리를 몇 가지 배웠다. 내 아버지처럼 감히 만가지 요리를 모두 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떨진 못하겠지만, 웬만한 요리는 대부분 할 수 있다.

​조선 여인 길순. 청진에서 아픈 아버지를 돌보던 중 만주로 오라는 오빠의 전갈을 받고 청진 역으로 나가 기차를 기다리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눈이 가려진 채 짐짝처럼 큰배의 짐칸으로 던져졌다.그녀처럼 영문도 모른 체 잡혀온 여자들과 공포에 떨며 웅크리고 있었는데 한 두 달만 참으면 따뜻한 남쪽으로 갈 수 있다는 사내들의 말에 울음을 잠재우며 그들을 믿었었다. 한 두달 후에 닿은 루손섬에서 그녀는 매일 같이 수많은 사내들의 억센 손길을 받아내며 치욕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6개월뒤 대륙으로 옮겨지며 중대장 이시하라의가 집을 얻어 그녀를 그곳으로 불려들였다. 수많은 사내들을 받아내는 삶보다는 편해졌지만 고달프고 힘든 삶에 반항이라고 할라치면 허리띠로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치고 그런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도망 나왔고 그렇게 숨어든 곳이 바로 첸의 집이었다. 첸이 죽음이 아니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가혹한 운명을 끝장내어 준 것이다.

 

첸은 광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지하 자경 단원으로 일본군 소위 하나를 목 벤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만주에 온 뒤 황궁으로 들어갈 궁리만 골몰하던 중 어느 새벽 황궁 주변을 얼씬거리다 순찰을 나온 병사들에게 잡혀온다. 자신은 요리사라며 광둥요리는 무엇이든 한다고 큰소리치며 끌려와 너와 네 가족의 목숨을 걸고 너의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보라는 모리의 내기에 응하게 된다. 양념은 물론 조리기구조차 쓸 수가 없고 더구나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1분, 기름을 쓸 수도 튀기거나 볶을 수도 찔수도 없다. 이런 까다로운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 피흘리지 않고 싸우는 법을 알려준 도마로 자신이 제일 잘하는 요리라는 무기를 앞세워 자신에게 주어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첸. 이것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이들을 엮어 놓은 것 마냥 얽히고 얽혀 모리와 첸은 끊임없이 부딪힌다. 전쟁의 두려움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타인 앞에서 여유로운 척 자신의 속마음을 짐짓 감춘 모리도 여인의 품안에서는 한낱 아이에 불과했다. 본인의 의지없이 흘러간 역사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묵묵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모리와 본인이 가장 잘하는 요리로 그를 처단하려는 요리사 첸,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끼인 길순.


책은 이 들 세 사람의 시점을 오가며 주인공의 속마음을 세밀히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각자 소신껏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되어 역사의 어느 한 편에 이들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만큼 어색함이나 주저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고 저자의 필력에 압도되어 눈앞에 펼쳐진 책을 도저히 덮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른 소설과는 틀리게 총과 칼을 앞세운 전쟁이 아닌 요리라는 소재를 도입하여 그 속에서 치열하게 서로를 탐하며 수없이 고민하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신선하게 보이면서도 처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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