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얼굴들
황모과 지음 / 허블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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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알이를 배운 한 살짜리 딸아이가 나를 부른다. 매일 밤, 아무리 밀쳐도 다가오던 내 딸. 오늘 기어이 내 품에 와서 안긴다. 순옥아, 내 딸 순옥아···. 고향에 가고 싶다. 돌아갈 때가 된 것 같다. (p.36)

 

이해할 수 없는 건 할아버지의 마음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 자체가 내게는 수수께끼다. 증오하면서 동시에 차마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괴롭고 고통스러우면서 끌어안고 있는 심리란 대체 뭘까? 마음이 슬퍼서 몸이 병들고 마는 이상한 선후관계,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니. 정체가 파악되지 않는 모호한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p.61)

 

눈앞에서 사람들이 탱크에 깔렸다. 도망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등 귀로 사람들이 짓밟혔다. 나는 철강 덩어리보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렸다. 결코 내가 갖는 죄책감을 저들이 강요하는 죄책감으로 혼동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속죄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 있든. 내 몸이 어디에 있든. 심장이 천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어 있던 심장이 오랜만에 펄떡였다. 죄책감의 늪에 빠져 꼼짝 못 했던 몸이 이제야 뜻대로 움직였다. 땀이 흘렀다. 터질 것같이 피가 솟구쳤다. (p.101)

 

 

 

 

 

이야기는 총 여섯 편! 그녀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첫 번째 이야기 <연고, 늦게라도 만납시다>와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2019년 수록작 <모멘트 아케이드>. 첫 작품은 한국인 여성을 만나게 된 주인공 나가, 그녀의 도움으로 이제껏 영문도 모른 채 소중히 간직해왔던 머리카락 부적이 누구의 머리카락인지 알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로 저자는 나가 잃어버렸던 과거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이 겪어야 했던 역사의 상흔을 함께 드러낸다. 이어서 제일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이야기는 타인의 기억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모멘트가 개발된 세계관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타인의 모멘트만 닥치는 대로 체험하는 나는 어느 날 인기 없는 모멘트를 우연히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생의 떨림을 느끼게 된 나는 자신의 지난 삶 속에서도 그런 떨림을 찾기 위해 언니의 모멘트를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면서 나는 자신이 언니를 오해 왔던 사실을 알게 되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책은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죽음에 대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얼굴들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 문제, 세대 간 갈등, 국가 간 갈등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서부터 삶과 죽음 같은 철학적인 문제까지 상당히 먼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과 죽음에 대한 총 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잃어버린 과거, 겹겹이 씌워진 가면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뒤바뀌는 것처럼 조각조각 나누어지는 이야기들. SF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울림이 제법 묵직하다. 잊혀진 역사, 남겨진 우리. 과거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우리의 역사와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까지 저자는 오랜 시간 동안 소외당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보다 깊숙이 파고든다. 그 덕분에 독자들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감탄하며 현실인 듯 아닌 듯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헷갈리듯 이어지는 이야기에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 반응을 보인다. 소설이지만 소설 같지 않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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