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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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할머니 안의 고독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처음엔 곧 녹을 수 있을 듯 얇은 막으로. 하지만 이내 허리까지 차오를 정도로 두텁고 단단한 층을 이루었겠지. 그렇지만, 나는 가까스로 생긴 친구들 눈에 지나치게 심각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여자애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할머니가 막 생리를 시작한 나에게 생리대를 사주기 위해 슈퍼에 갔지만 탐폰들만 잔뜩 있는 진열장 앞에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라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긴긴 하루를 견디다 지루해지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부러 일본식품점에 가지만 일본인 주인과 유창하게 의사소통할 때마다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꼈다는 사실 역시 미처 알지 못했다. (p.51)

 

할머니가 명주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우리를 알아본다거나 그래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거나, 그런 느낌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멍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보고 있긴 했다. 뭐랄까, 할머니는 자신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무엇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상상일까. (p.89)

 

민아는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부심을 갖고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회사는 서울의 중심가에 있었으나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민아의 집은 점점 서울과 멀어졌고 퇴직이 가까워오던 어느 해 민아는 느지막이 수도권에 작고 오래된 아파트를 마련해서 살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결혼을 했더라면, 큰 빚을 감당하고 악착같이 중심지의 집을 일찍 사두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민아는 반평생 자신이 가보지 않은 삶이 혹시 정답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과 회한에 시달렸었다. 지윤을 만나 다행한 점은 인생에 정답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지윤에겐 미안했지만 사실 그건 꽤 큰 안도감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했을 법한, 권해지는 삶을 산 지윤도 결국 유닛 D에 있지 않은가. (p.204)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할머니의 존재성을 전면에 내세운 첫 소설집.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여자 어른들의 이야기.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이제껏 항상 우리들의 곁에서 머물러 왔음에도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던 그녀들의 삶을 담은 <우리 할머니에게>. 이 책은 한국문학의 중심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6인 6색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소설집으로, 한 생애를 살아낸 모든 할머니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찬가이다. 가족의 의미가 흐려져 가는 시대에도 부모를 대신해 우리를 키우고 보듬었던 존재. 가족을 위해, 또 여성을 억누르는 부당한 세상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도 한 시대를 오롯이 버텨낸 역사의 증언자.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 이름, 할머니!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충실히 살아낸 우리 시대의 소중한 어른으로서 '할머니'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책은 이야기 하나하나 그 울림이 제법 묵직하다. 남편의 제삿날에 연락도 하지 않는 자식들에게 서운해하면서도 손주가 태어나면 구연동화를 해주는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담은 <어제 꾼 꿈>. 할머니의 고독과 외로움을 아름답게 그려낸 <흑설탕 캔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혼자 남겨질 손녀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마음을 담은 <선베드>.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큰 집을 처분하려 1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가 어릴 적 이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던 아주머니와 만나 겪게 되는 사건을 담은 <위대한 유산>. 11월의 어느 주말, 수덕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간 여자들의 이야기 <11월행>. 미래의 노인 문제, 세대 갈등, 이민자 문제 등을 그려낸 <아리아드네 정원>. 이 여섯 편의 이야기는 시대상을 반영하듯 다양하게 변주되며 해석된다.

 

나의 할머니에게. 누군가에게는 현재의 삶이자 또 누군가에게는 미래의 삶이 될지도 모르는 그녀들의 삶.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작가들의 고유한 감각과 개성이 담긴 이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추운 겨울 손녀를 위해 미리 따뜻하게 데워놓았던 아랫목, 제 딸을 힘들게 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밥그릇 위에 살포시 놓아주던 닭다리,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귀한 쌈지돈을 두 손에 쥐어 주었던 할머니, 딸 내외가 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 모습. 그 시절을 생각하면 따뜻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크다. 곁에 좀 더 오래 머물렸으면 좋았을 텐데, 남들보다 일찍 돌아가셔서 남겨진 추억이 많지는 않지만 기억에는 선명하게 남아있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을 조용히 추억하게 만들어준 <나의 할머니에게> 좋아요 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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