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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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은 여섯 살, 나는 열 살이었다. 보통 남매들은 싸우고, 질투하고, 소리 지르고, 징징거리고, 서로 죽도록 치고받고 싸운다. 우리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도 같은 너그러움으로 질을 사랑했다. 그 애를 이끌고,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다. 누나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순수한 사랑이었다. 아무것도 돌려받고자 하지 않는 사랑. 파괴될 수 없는 사랑. (p.14)

 

더 이상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나의 현실 세계는 녹아 사라졌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현기증 나는 무. 나를 에워싼 벽과 바닥과 천장조차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명백한 무. 극심한 공황이 몰려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어른이, 내 손을 잡고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길 바랐다. 내 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길 바랐다. 내일이 올 것이고, 이어서 또 그다음 날이 올 거라고, 그러면 결국 내 삶은 얼굴을 되찾을 거라고, 내게 말해 주길 바랐다. 피와 공포는 옅어질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p.33)

 

아버지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머리를 들어 올려서는 식탁에, 똑같은 지점에, 깨진 접시 파편이 널린 곳에 여러 번 내리찍었다. 나는 어느 것이 어머니의 피이고, 어느 것이 스테이크의 피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나는 그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모조리 지워 버릴 테니. 그러면 나의 새로운 미래에서는, 그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될 것이었다. (p.63)

 

 

 

불러주는 이가 없으니 주인공 소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소녀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네 살 어린 동생 질의 미소를 되찾아주는 일. 질의 웃음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녀는 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 질의 미소가 변했다. 아이스크림 할아버지의 끔찍한 죽음을 함께 목격한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점점 아버지의 잔혹성을 닮아간다. 이에 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소녀는 급기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사고도 막고 질의 미소도 되돌리겠다는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운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사냥을 제외하고, 삶에서 열정을 보이는 대상은 딱 두 가지, TV와 위스키. 주된 기능은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 그 외 정원을 가꾸고 어린 염소들을 돌보는 일에만 집착하는 어머니. 그리고 그 속에서 방치된 채 살아가는 소녀와 그녀의 동생 질. 누구라 할 것 없이 금세 이야기에 녹아든다. 상황묘사가 세밀하여 마치 지금 그 상황들이 눈앞에서 벌어진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점점 예전과 다르게 변해가는 동생과 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누나의 절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이들에게 허울일 뿐이다. 이들에게 제대로 된 부모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안타까움과 분노가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공포에 질린 어머니, 끔찍한 사고 후 아버지의 잔혹성을 닮아가는 동생까지 나락으로 치닫는 삶이지만 소녀는 절대 절망하지 않는다. 세상에 발을 내딛으며 홀연히 맞서 싸울 뿐. 그 과정이 무척이나 감동적이다. 폭력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삶이 꼭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소녀의 삶을 통해 몸소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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