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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내가 할 수 있었던 것들이, 해야 했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순간에는 그중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으니까. 관객이 있었다면 아카데미상도 아깝지 않을 60초짜리 무성 영화였다. 만약 누군가 내게 첫눈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지 물어보면, 이제부터 나는 그렇다고 해야 한다. 2008년 12월 21일 어느 눈부신 1분 동안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p.16)
내 심장에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대체 어떻게 일이 이렇게 개판으로 꼬일 수 있지? 그가 세라의 것일 리 없어. 그는 내 거야. 꼬박 1년 동안 내 것이었어. “내 친구 너무 괜찮지?” 지금 세라는 내 등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자랑스레 내보인다. 서로 포옹하라고 나를 잭 쪽으로 떠민다. 세라는 우리를 어서 빨리 절친으로 만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 나는 너무나 비참하다. 잭이 눈을 굴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세라의 보채는 태도가 불편한 것처럼. (p.43)
우리는 다시금 침묵에 빠진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뭐라도 할 말을 이리저리 찾는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까봐. 그에게 나를 버스 정류장에서 본 기억이 없느냐고 물어보게 될까 봐. 조만간 내가 이 망할 충동과 싸울 필요가 없어지기를, 그 기억이 내게서 중요성도 타당성도 잃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희망한다. 이 또한 지나가기를. (p.81)
나는 질문을 보류한다. 어차피 오늘은 내 생일이고, 나는 대관람차를 좋아하고, 나는 잭과 함께 있다. 그를 볼 때마다 그가 점점 더 좋아진다.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괜찮다. 진심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데, 진심이다. 잭과 세라는 이론의 여지 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세라를 자매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대체로 나는 이 상황을 달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게 현실이니까.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만약 내가 먼저 그를 찾아냈다면, 그럼 아마 그는 지금 내게 팔을 두르고 있을 거고 우리가 회전 바퀴의 꼭대기에 다다르면 내게 키스하겠지. 아마 우리는 까무러치게 사랑에 빠져 있겠지. 아니면 어차피 연인이 될 운명은 아니었던 걸로 판명 났거나.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는 지금의 상태다. 그가 내 인생에 있고,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그거면 충분하다. (p.111)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사람들로 가득한 숨 막히는 버스를 타고 가던 로리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번개가 치는 느낌,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걸까?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흐른 후 남자가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차는 출발해버린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 후 로리는 그와 우연히 마주치기만을 빌면서 지난 1년을 보냈다. 그때 버스 창문 너머로 보았던, 버스보이를 찾아서. 그런데 드디어 그가 나타났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의 애인이 되어.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다. 누군가 가슴에 전기 충격 패드를 붙이고 강도를 최대치로 올린 느낌이다. 로리는 마음을 숨긴 채 태연한 척 인사하지만, 남자는 왠지 로리를 알아보는 것만 같다. 그녀와 그,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첫눈에 반했던 남자가 내 친구의 애인이 되어 나타났다.” 두 사람, 열 번의 기회, 단 하나의 잊지 못할 사랑.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마법 같은 러브스토리!
첫눈에 반한 사랑? 여기에 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무려 열 번의 기회! 운명이란 게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이들의 사랑은 운명임이 틀림이 없다. 이들이 운명이 아니라면 운명적인 사랑은 죄다 거짓! 책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살포시 떠오른다. 우여곡절 끝에 만났건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순탄치 않은 이들의 사랑. 이 책은 정말 재미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읽었다. 보는 사람들은 이들의 사랑을 열렬히 응원하지만 여기저기서 복병이 너무나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정과 냉정 사이를 왔다 갔다 대환장 파티의 서막이 올랐다. 사랑이냐 우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어질 듯 말 듯, 너무나 애절한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읽으면 참 좋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