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줘
이경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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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허물은 발꿈치의 한 점을 바늘로 따끔하게 찌르는 느낌에서 시작됐다. 따끔따끔 벌레가 모공에서 기어 나오고, 동시에 다른 모공에서 따끔따끔 올라오고, 또 그 옆에서 따끔따끔 다리 전체로 옮아갔다. 가려움에 미치게 되리라는 예감은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부서뜨리고 싶은 충동으로 몰아갔다. 손톱이 지난 자리는 붉게 부어올랐다가 불그스름한 홍반으로 피어났다. 수십 개의 홍반들이 사각형 모양의 회갈색 딱지로 변하더니 점차 허물로 굳어버렸다. (p.8)

 

다른 구역 사람들에게 D구역 사람들의 피부는 깨끗하다 해도 깨끗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라도 바이러스를 옮길 수 있는 숙주와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레 초래하는 귀결은 D구역은 다른 구역과 격리 돼야 한다는 거였다. 그것은 다분히 정서적인 것이었지만 확실하게 작용하는 금기의 전제가 됐다. 간혹 원거리 여행을 떠나는 철새들처럼 훌쩍 떠나갔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름에 흠뻑 젖은 깃털을 질질 끌며 구사일생 자신의 둥지로 되돌아왔다. (p.12)

 

방역 센터로 간 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가족 앞으로 우편물이 배달됐다. 환자가 치료 도중 상태가 악화돼 사망했다는 통보와 함께 시 외곽에 있는 화장시설에서 소각됐다는 증명서였다. 가족들은 시체를 보지도,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그들의 죽음은 다만 기록으로 증명됐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방역 버스에 올랐다. 죽은 사람들은 운이 나빴을 뿐이고, 자신은 그렇게까지 운이 나쁘지 않기만을 바랐다. (p.33)

 

프로틴은커녕 끼니도 잘 챙기지 못하니 허물은 금방 자라났다. 별 수 없이 다시 공원으로 와 전처럼 공원 관리인과 숨바꼭질하며 지냈다. 밤이면 벤치에 누워 생각했다.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p.71)

 

 

 

D구역에 격리된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피부 각화증이 심해져 뱀의 허물 같은 각질이 온몸을 뒤덮는 풍토병을 앓고 있다. 전문가들은 각질세포 형성에 관여하는 구조단백질이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티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유독 티셀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고 증세가 심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도시화되기 이전 혈족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촌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유전적 결함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그들은 전설 속 거대 뱀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모든 허물이 영원히 벗겨진다고 믿고 있다.

 

주인공인 그녀는 파충류 사육사다. 석 달 전 산사태로 동물원이 무너지자 야생동물들은 도시 곳곳으로 흩어지고 그로 인해 인구 50만 명의 도시가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동물원은 폐쇄되고 그녀는 직장을 잃었다. 이후 그녀의 삶은 궁핍해졌다. 그녀에게 허물이 생긴 건 한 달 전, 발꿈치의 한 점을 바늘로 따끔하게 찌르는 느낌에서 시작된 허물은 미칠 듯한 가려움과 함께 손톱이 지난 자리가 붉게 부어올랐다가 홍반으로 피어나 사각형 모양의 회갈색 딱지로 변하더니 점차 허물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허물을 벗기 위해 방역센터에 입소한다. 방역센터는 시 당국이 허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운영하는 곳으로 약물을 주입해 시민들의 허물을 벗겨내는 도시 내 유일한 기관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치료 과정을 거쳐 허물을 벗고 방역 센터에서 나와 직업도, 이웃도 없는 삶과 마주하며 결국엔 벌거벗은 기분으로 공원에서 잠을 자다 다시 허물 속으로 숨어들기 마련이었다. 방역센터에서 허물을 벗고 퇴소하면 다시 허물을 입게 되는,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을 알지만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녀는 그곳에서 김과 후리, 뾰족 수염과 척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전설 속 거대한 뱀이 폐허가 된 궁의 아궁이에 산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녀와 김, 후리는 궁의 아궁이에서 거대 뱀을 꺼내 D구역 끝에 있는 김의 재생타이어 가게로 향한다. 그곳에는 겹겹이 쌓은 항공기 타이어가 긴 동굴처럼 이어져 있어 그들은 거대 뱀을 타이어 동굴 속에 숨기고 허물을 벗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전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그때 알게 될 것이다.

 

 

“롱롱을 찾으면 정말 허물을 벗을 수 있을까. 영원히 허물을 벗으면 한 번도 허물 입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한 번도 버림받지 않은 사람처럼 살 수 있을까.” “허물을 벗고 싶다. 엄마가 버린 허물 같은 아이, 버림받아도 좋다는 표식 같은 이 허물을 벗어버리고 싶다.” 전설 속 거대한 뱀 롱롱을 찾아 나선 파충류 사육사와 방역센터의 입소자들. 허물에 덮인 그들이 D구역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도시정부와 도시를 움직이는 거대 제약 회사가 모의한 충격적인 음모가 드러난다. 예로부터, 롱롱이 허물을 벗으면 세상의 허물이 죄다 벗겨진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그렇게 될까?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시간순삭! 흥미진진! 정말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소재는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특색이 있다. 특히 제약된 상황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극한 공포와 분노,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들이 강렬하게 뇌리에 들어와 박힌다. 결말이 어찌 되었던 간에 무조건 끝까지 정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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