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아는 농담 - 보라보라섬에서 건져 올린 행복의 조각들
김태연 지음 / 놀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그리고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를 믿는 어른이 있을까. 그 누구도 영원을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사랑을 할 때 하는 약속들은 헤어지기 전까지만 유효하다고 했다. 사랑을 해보고 잃어보고 잊어본 사람이라면, ‘영원히 사랑해’라는 말에 더 이상 속지 않게 된다. 그러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아주고 싶은 사람을,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된다. 여기서 진짜 어른들의 동화가 시작된다. 비극일지 희극일지 모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랑이 허락되는 동안 사랑하는 것뿐이다. 내일의 일은 모르겠다. (p.23)

 

줄곧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그런 어른을 만나지 못해서 그냥 내가 말하고 내가 들었다. 경제적 자립은 중요하다. 그러니 계속할 수 있는 일들을 잘 해내려고 한다. 세상은 이런 걸 꿈으로 쳐주지는 않는 것 같다. 모르겠다. 내가 아는 건 꿈을 이루는 사람들이 드문 세상에서도, 꿈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면 꽤나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 정도다. 꿈의 바깥에도 삶은 있다. (p.45)

 

잠깐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거나, 그저 지루함을 버텨내는 일이거나,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일이어도 괜찮다. 상대에 따라 전부이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 운이 좋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낼 수 있는 일들.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각의 일들을 지나오는 동안 우리가 조금씩 성장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작은 일도, 무의미한 일도 그래서 모두 의미가 있다. (p.57)

 

세상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라더니, 보라보라섬이 딱 그런 것 같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나쁜 일도 생긴다. 행복하다기엔 만만치 않고, 불행하다기엔 공짜로 누리는 것 투성이다. 깨끗한 공기, 따뜻한 바다, 선명한 은하수···. 어디든 더하기만 있거나, 빼기만 있는 곳은 없을 거다. 그건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늘 까먹으니 문제지. (p.118)

 

 

 

 

언제나 여름인 남태평양의 외딴섬 보라보라에서 9년을 살았다. 맨몸으로 바다를 헤엄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별자리를 바라보며 온갖 나무와 꽃 이름을 알게 되는 근사한 삶을 꿈꿨지만, 사실은 암막 커튼 쳐놓고 넷플릭스를 보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먼 북소리가 아닌 인생 종 치는 소리가 들려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라이프스타일 잡지 <AROUND>에 ‘보라보라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약 4년간 칼럼을 연재했다. 이 글은 그녀가 그곳에서 9년간 생활하며 배운,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의 태도에 대한 에세이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위로한다. 사소한 일이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에(블레즈 파스칼). 우리는 정말 아주 작은, 사소한 일에 바르르 성질을 부린다. 생각해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왜 그렇게 집착을 하며 후회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경우처럼 언뜻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일들도 알고 보면 아주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일들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다. 보라보라섬에서의 삶이 그러했다. 타지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음할 수 없는 단어가 계속 나타났다. 이리저리 발음을 바꿔가며 말해도 상대는 알아듣지 못했고, 하려고 했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을 해버리기도 했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웠다. 말을 하면 숨겨둔 뉘앙스까지 귀에 탁탁 꽂히는 모국어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 귀에 들어올 듯 들어오지 않을 듯 물소리가 찰방찰방 멀어지다 순간 고요해지는 그 순간을 언제부턴가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보물상자와도 같았다. 낯선 세계가 숨겨왔던 표정을 발견해나가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오늘을 나누는 일.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일들에 다시 사소한 위로로 맞서는 일. 그저 그런 하루에 의미가 더해진 순간 그 하루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냥 좋다. 이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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